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비룡소
1판 4쇄
1
얼마 전 남편이 이 책을 읽고 난 뒤 이렇게 말했다.
"이런 책이었어? 아, 난 몰랐네. 책 내용이 너무 좋아서 충격받은 것 같아."
"그렇지?" 하고 대답하는데 내용이 가물가물했다. 안 읽은 것도 같았다. 그리하여 집어 들었다. 한 동안 이북리더기를 쓰다가 오랜만에 오랜 된 종이책을 읽으니 냄새도 좋고 촉감도 좋고 눈도 편안하고 마음까지 따뜻했다.
어떤 드라마에선가 이 표지의 책을 보고 한 눈에 반 해 샀던 때가 20년 전이었다. 세월을 생각하면 읽었어도 잊었겠다 싶었는데 무릎을 탁 치게 하는 재치 있는 챕터 제목들을 보고 이걸 어떻게 잊나 싶어 안 읽었던 걸로 결론을 내렸다.
1부 모모와 친구들
제1장 어느 커다란 도시와 작은 소녀
제2장 뛰어난 재능과 아주 평범한 싸움
제3장 폭풍 놀이와 진짜 소나기
제4장 말 없는 노인과 말을 잘 하는 청년
제5장 많은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와 한 사람만을 위한 이야기
2부 회색 신사들
제6장 똑떨어지는 엉터리 계산
제7장 모모는 친구들을 찾아가고, 한 명의 적이 모모를 찾아온다
제8장 많은 꿈과 몇 가지 의혹
제9장 열리지 않은 좋은 모임과 열린 나쁜 모임
제10장 맹렬한 추격과 느긋한 도주
제11장 악당들의 모략
제12장 모모, 시간의 근원지에 가다
3부
제13장 그곳에서의 하루, 이곳에서의 한 해
제14장 너무 많은 음식과 너무 짧은 대답
제15장 기기를 다시 찾았다 잃다
제16장 풍요 속의 궁핍
제17장 크나큰 두려움과 더 큰 용기
제18장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면?
제19장 포위된 이들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제20장 뒤를 쫓던 자들을 뒤쫓기
제21장 새로운 것이 시작되는 끝
2
도로 청소부 베포는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자신의 청소 일에 대해서 만큼은 사뭇 길게 이야기하였는데 그 이야기는 일을 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대하는 태도, 아니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충고하는 것 같았다. TV 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을 보았을 때처럼 숙연해졌다.
"얘, 모모야. 때론 우리 앞에 아주 긴 도로가 있어. 너무 길어. 도저히 해 낼 수 없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이 들지." "그러면 서두르게 되지. 그리고 점점 더 빨리 서두르는 거야. 허리를 펴고 앞을 보면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 그러면 더욱 긴장되고 불안한 거야. 나중에는 숨이 탁탁 막혀서 더 이상 비질을 할 수가 없어. 앞에는 여전히 길이 아득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야." "한꺼번에 도로 전체를 생각해서는 안 돼, 알겠니? 다음에 딛게 될 걸음, 다음에 쉬게 될 호흡, 다음에 하게 될 비질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계속해서 바로 다음 일만 생각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일을 하는 게 즐겁지.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러면 일을 잘 해낼 수 있어. 그래야 하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다 보면 어느새 그 긴 길을 다 쓸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겠고, 숨이 차지도 않아." |
p.50-51
3
"언제 도착해?" 라는 다섯 살 된 작은 아이의 물음에 내비게이션의 남은 시간을 보고 답했다.
"이제 다 왔네. 5분 후면 도착하네."
"5분이면 짧은 거야?"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5분은 짧은 시간일까? 긴 시간일까? 무엇보다는 길고 무엇보다는 짧은 것일까? 누군가에게는 짧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긴 것일까? 어떤 일을 할 때는 짧고, 다른 어떤 일을 할 때는 긴 것일까?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결국 이렇게 말했다.
"태오가 한 번 5분이 어느 정도의 시간인가 느껴봐."
시간을 재기 위해서 달력과 시계가 있지만, 그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사실 누구나 잘 알고 있듯이 한 시간은 한없이 계속되는 영겁과 같을 수도 있고, 한 순간의 찰나와 같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한 시간 동안 우리가 무슨 일을 겪는가에 달려 있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이니까. |
p.77
그러고보면 시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시간에 활동한 우리의 삶만이 있는 것이다.
4
그는 일하는 것을 정말 즐거워했고, 자기 솜씨에 자부심도 갖고 있었다. 특히 턱 밑을 면도할 때에 그보다 솜씨가 좋은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모든 것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누구에게나 그런 순간이 있는 것이다. |
p. 79
어느 날 이발사 푸지 씨는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며 우울해하고 있다가 회색 신사를 맞닥뜨려 시간을 빼앗기게 되었다. 나에게도 찾아왔던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그런 순간에 나도 회색 신사에게 속아 시간을 빼앗겼던 것은 아닐까? 나도 시간을 빼앗긴 채 시간에 쫓겨 아등바등하고 시간을 아껴야 한다고 종종거리는 푸지 씨와 같았으니까 말이다.
5
요즘 들어 제대로 갖고 놀 수도 없는 온갖 종류의 장난감을 들고 오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 이를테면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할 수 있는 원격 조종 탱크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말고는 아무 짝에도 소용 없는 것이었다. |
p.102
우리 집에도 저런 장남감들이 여럿 왔다가 갔다. 저런 종류의 장난감은 약간 기계 같은 면이 있어서인지 값도 만만치 않았지만 아이들의 사랑을 오래 받지 못했다. 바코드도 달려 있고, 버튼을 누르면 소리도 나고 하는 마트 계산대가 있어도 그것은 마트 계산대로만 사용할 수 있었고, 혹여나 마트 계산대가 없었어도 마트 놀이를 할 방법을 생각해냈을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생일과 크리스마스에만 장난감을 사주고 있었는데 마트에서 장난감 진열대를 마주하는 순간 복잡하고 화려해 보이고 신기한 기능이 있을 것만 같은 저런 종류의 장난감에 현혹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낭비된 돈과 자원, 그리고 버려진 쓰레기에 대한 죄책감으로 올해부터 선물은 장난감이 아닌 것으로 주문하라고 일러두었으나 어찌 될지 지켜볼 일이다.
6
회색 신사가 모모를 이렇게 위협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딱 한 가지야. 뭔가를 이루고, 뭔가 중요한 인물이 되고, 뭔가를 손에 쥐는 거지. 남보다 더 많은 걸 이룬 사람, 더 중요한 인물이 된 사람, 더 많은 걸 가진 사람한테 다른 모든 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거야. 이를테면 우정, 사랑, 명예 따위가 다 그렇지. (후략)" |
p. 130
회색 신사조차 알고 있었다. 성공하려는 이유가 우정과 사랑과 명예 때문이라는 것을.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것은 성공 그 자체가 아니라 우정과 사랑과 명예라면 우정과 사랑과 명예를 해치면서까지 성공하려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잊지 않아야겠다.
7
호라 박사가 모모에게 수수께끼를 냈다.
세 형제가 한 집에 살고 있어. 그들은 정말 다르게 생겼어. 그런데도 구별해서 보려고 하면, 하나는 다른 둘과 똑같아 보이는 거야. 첫째는 없어. 이제 집으로 돌아오는 참이야. 둘째도 없어. 벌써 집을 나갔지. 셋 가운데 막내, 셋째만이 있어. 셋째가 없으면, 다른 두 형도 있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가 되는 셋째는 정작 첫째가 둘째로 변해야만 있을 수 있어. 셋째를 보려고 하면, 다른 두 형 중의 하나를 보게 되기 때문이지! 말해 보렴, 세 형제는 하나일까? 아니면 둘일까? 아니면 아무도 없는 것일까? |
p.210
수수께끼의 답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하지 않겠지만 이미 짐작했으리라 본다.
8
모모는 일찍이 그토록 찬란하게 아름다운 꽃을 본 적이 없었다. (중략) 하지만 그 때 추가 천천히, 정말 천천히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추가 서서히 멀어지면서 그 아름다운 꽃도 시들기 시작했다. (중략) 추가 검은 연못의 한가운데에 이르자 그 아름다운 꽃은 완전히 스러져 버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맞은편에서 꽃봉오리 하나가 어두운 물 속에서 자태를 드러냈다. (중략) 그 꽃은 앞의 꽃과는 전혀 달랐다. |
p.221
이 장면에서는 '시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윤회가 연상되었다. 독일 작가의 소설에서 불교의 윤회 사상과 대면할 줄은 몰랐다. 곧이어 대학 때 단체 관람했던 이만희 극본의 연극 '피고지고 피고지고'의 말미에 인생을 꽃으로 표현했던 대목에서 울컥했던 것이 생각났다.
9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모모는 문득 마음 속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과 무력감이 점점 자라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확 뒤집혀 정반대의 감정으로 돌변했던 것이다. 이제 어려움을 이겨 낸 것이었다. 모모는 용기와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이 세상 어떤 세력도 자기를 털끝만큼도 다치게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털끝만큼도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
p.301-302
모모의 두려움이 용기로 바뀐 데는 모모 내부의 작용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생각 하나로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이 부분에서도 나는 원효대사의 해골 물 일화가 떠올랐는데, 신라시대의 불교 사상이나 1970년 독일의 소설가가 일컫고 있는 진리가 똑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사색에 잠겼다.
10
"그래, 그 동안 내내 날 찾았니?" "물론이야." "그런데 어떻게 바로 지금, 바로 여기서 날 찾을 수 있었니?" 거북의 대답은 이랬다. "그럴 줄 벌써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 카시오페이아는 그 전에는 모모를 찾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내 모모를 찾아다녔단 얘기 아닌가? 그렇다면 사실 찾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 |
p.312-313
앞날이 궁금해서 점쟁이를 서너번 찾아가 본 적이 있었다.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처럼 운명을 미리 안다면 어떨까? 이 의문은 아이들과 인도의 옛이야기를 읽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그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이랬다.
먼 옛날, 인도에 점을 아주 잘 치는 한 남자가 있었는데 그는 아들에게 점 치는 요령에 대해 가르쳤다. 그 아들 역시 점을 잘 치게 되었는데 하루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가 자신이 2년 후, 열여덟 살이 되면 죽을 것이라는 걸 알고 시름시름 앓게 된다. 그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며 갠지스 강으로 가서 남은 여생을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며 보내기로 한다. 갠지스 강으로 가는 여정에 여차저차하여 한 왕국의 공주의 결혼식에서 가짜 신랑 노릇을 하게 되어 공주를 마주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가짜 신랑이었기 때문에 곧 왕국에서 쫓겨나고 예정대로 갠지스 강으로 가서 기도를 하면서 지내다가 열여덞 살이 되는 날 기도를 하러 가는 돌계단에서 미끄러져 죽고 만다. 한편, 그와 사랑에 빠진 공주는 슬퍼하며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한다. 공주의 정성스러운 기도에 화답하여 시바 신은 죽은 그를 살려 공주에게 보내준다.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큰 아이가 말했다.
"갠지스 강에 기도하러 가지 않고 고향에 남았다면 열여덟 살에 죽었을까? 기도하러 가서 죽은 것 같은데? 그렇다면 미래를 미리 안다는 건 좋은 것 같지가 않은걸. 아닌가? 미리 알아서 죽었다가 살아난 건가?"
나도 모모처럼 머리가 핑글핑글 돌았다. 다시 정신 차리고 정리해보면,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안다는 것은 변수가 생긴 것을 뜻한다. 즉, 운명에 예정된 것과는 다른 생각과 다른 의지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명을 미리 알면 운명대로 되지 않기 쉽다. 예를 들면, 모모를 찾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안다면 저도 모르게 찾는 것에 게을리할 것이고, 그렇다면 모모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만약 모모를 찾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면 모모를 찾는데 열심이었을 것이므로 모모를 찾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카시오페이아는 미래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해서 미래에 그 일이 일어나도록 했다. 대단하다.
11
책의 결말에 다다라 묘사된 멸망의 길에 이른 회색 신사들의 난투극은 너무도 생생해서 정말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탈리아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내가 상상한 모모의 모습이 아닐까 봐 보기 망설여지지만 이 장면을 어떻게 연출했을지 무척 궁금하기는 하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지금껏 내가 읽은 글 들중에서 가장 강렬했다. 책장을 덮으며 '하하하' 하고 웃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인용은 생략한 채 책 「모모」의 독서 후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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