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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가지 생각

나와 Covid 19의 관계

 2021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전 세계가 Covid 19의 영향력 아래에 있지만 나라마다, 기업마다, 개인마다 다른 전략을 가지고 저마다 다른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Covid 19가 나에게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나는 뉴질랜드에서 전업주부로 지내고 있다. 지금부터 Covid 19와 함께한 나의 2020년도를 복기함으로써 뉴질랜드에서 전업주부가 된 과정을 공유하고자 한다. 

 

 2019년 말 코로나 바이러스의 첫 감염자가 발생한 후, 2020년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뉴질랜드 정부는 3월 19일부터 국경을 폐쇄하고 자국민 입국만을 허용하기로 결정하였으며, 3월 25일부터는 내국인 전체를 대상으로 자택 격리 (Lock Down, 락 다운)를 선포하고 4월 27일 이후 점차적으로 수위를 낮추는 고강도의 폐쇄적인 정책을 펼친 결과 인구 대비 감염자가 가장 적은 나라로 손꼽히게 되었다. 가장 고비였던 순간인 2020년 4월 초의 활성 중인 감염자 수가 929명 (인구 490만 명)과 당일 신규 발생자가 89명이었으니 세계 모든 언론들이 뉴질랜드를 집중 조명하였으며, 뉴질랜드 인들 역시 자축하고 뉴질랜드 정부의 결정을 치하하였다. 이를 반증하듯이 2020년 10월 총선에서 재신다 아던이 재선에 성공했다. 

 

 자택 격리가 선포되었을 당시 나는 2019년 말 회계학 공부를 마치고 얼마 안 되고 큰 아이의 여름 방학 (뉴질랜드는 남반구에 있기 때문에 한국과 계절이 반대이다.)이 시작되어 2020년 2월 개학할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놀고 싶었으나 취업을 앞둔 불안함이 자나 깨나 따라다녔다. 그렇게 오지 않기를 바라던 개학일이 다가왔고, 나는 외국인 취업준비생이 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준비하고, 발송하고, 기다렸다. 그러던 중 너무 큰 조직이라 기대도 않던 와이카토 지역의 국립병원으로부터 서류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면접을 준비하면서 뉴질랜드에 와서 가장 긴장되었던 일주일을 보냈다. 50분간의 진땀 나는 면접을 보고 나와 첫 면접 치고는 괜찮다 자족하였으나 며칠 후 전화벨이 울렸다. 친절하게도 낙방 소식을 전하는 전화였다. 당연히 아쉬운 마음이 컸으나 나 같은 이방인에게도 기회를 주는구나 하고 희망을 보았기에 지원서 100개 쓰기를 목표했던 그때 자택 격리가 발동된 것이었다. 어린아이들과 남편과 근 한 달을 집에만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지원서 쓰기를 중단했지만 오랜만에 취업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된 기분이었다.   

 

 자택 격리가 끝나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고, 나도 다시 부지런히 취업을 향해 달려갔다. 비자 만료 기간이 있는 나로서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그냥 흘러간 것이 뭔가 조금 억울하기도 했지만 Covid 19으로 인한 다른 사람들의 피해와 노고에 비하면 투정 부릴 만한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다. 첫 면접이 너무 빨리 찾아왔던 것인지 두 달이 지나도록 서류 합격 소식 조차 들을 수 없었고, 또 아이들의 겨울 방학이 찾아왔다. 나는 또다시 해방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느꼈다.

 

 아이들의 겨울 방학 (뉴질랜드의 겨울 방학은 2주로 짧은 대신 학기 도중에 2주간의 방학이 또 있다.)에는 새로운 인연을 만났다. 뉴질랜드에 온 지 3년 차로서 인연을 많이 맺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몇몇 한국인 가정과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던 한 가정에서 함께 어울리던 무리에 우리 집 큰 아이의 또래가 없어 심심해하는 것 같다며, 또 다른 가정을 내게 소개해 주었다. 그 가정은 우리 집 큰 아이보다 한 살 많은 딸아이와 두 살 아래인 아들이 있고, 엄마는 내가 면접을 봤던 그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아빠는 사업 차 베트남에 갔다가 Covid 19의 영향으로 뉴질랜드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은 3교대이고, 아이들 아빠는 사업 차 해외 출장이 많아서 아이들의 할머니와 외할머니가 한국으로부터 교대로 오셔서 아이들을 돌보고 계셨는데 2020년 3월, 국경이 폐쇄된 이래 뉴질랜드로 들어오실 수가 없어 그 집 엄마가 병원을 잠시 쉬고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 집 아이들과 우리 집 아이들이 만나게 되었고, 우리 집 큰 아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한 언니를 얻었다. 

 

 아이들의 겨울방학이 끝나고 내 생일을 앞둔 어느 날, 회계학 과정 중 인턴쉽을 했던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계사무소의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바로 연락을 했다. 원래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던 직원이 풀타임 정규직으로 취업이 된 것이었는데 뉴질랜드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의 회계직으로의 이직이었다. 그래서 그 공석은 파트 보직이었는데 향후 나의 비자 연장이나 영주권 신청에 이로운 조건은 아니어서 쉬운 결정은 아니었으나 며칠 후 채용 결정이 났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하여 3일 만에 퇴사하게 되면서 빨강머리 앤이 말한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 한 달간 빠져 지냈다. 그 시간, 남편은 이직을 했다. 남편은 뉴질랜드에 도착하자마자 하우스 페인터인 옆집 아저씨와 친해지면서 페인팅 일을 배웠다. 내가 2년 동안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남편은 주중에는 큰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작은 아이를 집에서 돌보는 일을 하고 주말에는 페인팅 일을 했다. 내가 졸업을 하고 취업 준비를 하게 되면서 남편은 주말이 아닌 주중에 일을 하기 시작했고, 내가 아이들 픽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겁쟁이라 운전을 못했던 나는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운전대를 잡게 되었고, 틈 나는 대로 남편으로부터 운전 연수를 받았는데 얼마나 긴장한 건지 운전 연수를 받은 날은 반드시 몸살에 앓아누웠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운전에 능숙해졌다. 그리고 내가 취업하여 3일간 인수인계받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대기업으로 이직하게 됐다던 그 직원의 남편도 페인터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 팀에서 경력직을 채용 중이라는 소식을 내게 알려줬고, 남편은 좋은 조건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내가 삼일천하로 퇴사하는 날, 남편은 이직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Covid 19가 내게 남긴 유산 

 

인간만사 새옹지마라더니 Covid 19은 나에게 좋지 않은 기억도 남겼지만 그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긴 일이 좋은 일을 불러오기도 하였으니 나는 이것을 Covid 19가 남긴 유산이라고 부르고 싶다. 

 

1. 큰 아이의 새 친구

2. 만년 장롱 면허 탈출

3. 남편의 이직으로 인한 임금 상승

4. Mind Map 노트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저 노트가 생겨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당분간 해야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로 했다. 지금 나와 같은 만기가 있는 학업 후 워크비자를 가지고 있는 이민자들은 취업을 위해 애쓴다. 지금 내가 해야할 일도 그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일단 나에게 휴가를 줘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잠정적으로 취업을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지내기로 하였으며, 그래서 잘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블로그를 처음으로 시작하게 된 것으로 보아 태평하고 느긋하게 만끽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뭐라도 생산해내지 않으면 쓸모 있는 인간으로 잘 살고 있다는 만족을 얻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글을 쓰기로 (정확히 말하면 끄적거려 놓았던 글을 방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블로그는 취업을 준비하면서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기 데 도움이 된 도구들, 취업 과정에서 느꼈던 좌절감과 패배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들, 그리고 주부로 살기로 마음먹으면서 루틴으로 자리 잡은 내 라이프 스타일 등 저 노트에 빼곡히 담긴 것들로 채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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