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만 가지 생각

나를 나에게 들킨 느낌

 2020년 8월 14일. 그 날의 내 상태는 생각이 생각을 낳고, 마음은 첩첩산중이고 오리무중이었다. 그럴 때 쓰는 처방전이 있다 하여 한번 해보았다. 그것은 '나와의 대화'. 너무도 솔직한 대화에 깜짝 놀람과 동시에 내가 나 스스로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됐다. 이 대화를 옮겨 적으려니 지금 내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나: 나 나이 마흔이야. 여기 뉴질랜드에 정착하려면 정규직이 필요해. 내가 1년 반 안에 정규직으로 취업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자신감이 차오르다가도 이번처럼 이런 일을 겪으면 확 꺾여버려.

 

또 다른 나: 일단 너 나이 마흔에 타국에 와서 2년 동안 공부한 거, 그것도 애들 돌보면서 한 거 진짜 잘한 거야. 그거 먼저 축하해줄게. 그리고 1년 반 남았다 했지? 너 그 1년 반을 어떻게 쓰고 싶어? 정규직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동시에 과연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으로 채우고 싶은 거야? 너 혹시 니가 진짜 원하는 게 정규직이 아닌 거 아니야? 이번 일도 한 번 봐봐. 너 파트타임 잡으로 취직됐다고 했을 때 뭐가 가장 좋았어?

 

나: 애들을 돌볼 수 있다는 거. 근무시간이 딱 아이들 학교 타이밍하고 맞아서 그게 가장 좋았어. 그런데 막상 일을 시작하니 출근 시간에 긴장해서 아이들에게 짜증 내고, 퇴근 시간 다가오면 빨리 마무리하고 가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지고, 나가면서도 눈치 보느라 불안했어. 하루를 긴장감 200%인 상태로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을 상냥하게 대할 수가 없었어. 과연 이걸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일까? 그러던 중 근무 3일째밖에 안되었을 때 무차별적으로 쏟아진 부정적인 평가와 인신 공격성 발언, 가중한 업무 압박을 견딜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드니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가 보다 했어.

 

또 다른 나: 거봐.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니가 원하는 자리가 아니었던 거야. 또 어떤 생각이 들었니?

 

나: 큰일났다고 생각했어. 나 이렇게 정규직으로의 길과는 멀어지는구나. 어쩌면 이 나라에서 계속 살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다 보니 또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다음은 어쩌지? 막막한 생각에 아이들이 눈에 밟혔지.

 

또 다른 나: 정말 니가 정규직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여기에서 살 수 없는 거야? 니가 여기서 살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리고 꼭 여기서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한국으로 돌아가서 살게 되더라도 그 사이 너도, 한국도 많이 변했으니까 예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볼 수도 있을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나라에 가보는 건 어때? 생각만 해도 신나지 않니?

 

나: 응! 듣고 보니 좀 신나는 것 같기도 하네.  

 

또 다른 나: 그렇다면 이번에는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논해보자. 너 지금 돈 없어? 당장 쓸 돈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지금 걱정이 아니라 나중이 걱정이라고? 그럼 돈 걱정은 나중에 해. 막상 나중이 되면 돈 걱정할 거 없이 술술 다 풀려 있을 수도 있는 거라고. 자, 그럼 이제 일 얘기를 해볼까? 니가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해왔지?

 

나: 나 학교 다닐 때까지는 공부만 했고, 졸업 후 회계사가 되서 회계법인에서 10년 일하고 나왔지. 그리고 뉴질랜드 와서 다시 회계학 공부를 하고 보니 회계사로 일할 때 좋았었어. 그땐 몰랐지만 참 매력적인 일이었던 것 같아.

 

또 다른 나: 잠깐,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자. 그런데 너 밥벌이로 좋아하는 일을 하기로 한 거야? 잘하는 일을 하려던 것 아니었어? 아니, 왜 이민법을 고려하면 말이야. 정규직 일자리를 구해야 하니까 당장 취업할 수 있는 일, 그러니까 잘하는 일을 하려던 거였잖아.

 

나: 응. 그러려고 했었지. 근데 이번 사건으로 깨달았어. 나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월급 받고 싶은 게 아닐지도 몰라. 내 일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느껴졌어. 그럼에도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것 같아. 가족들이나 친구들 말이야. 그래서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닌 곳으로 가고 있었던 게 아닐까?

 

또 다른 나: 시부모님이나, 가족 모두인 것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야. 니가 신경 쓰는 그 친구들, 이것도 니가 모든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하는 말이야. 그들이 널 어떻게 볼지가 중요해? 니 옆에 있는 너의 남편도 너의 자유로운 선택을 지지해 줄 사람이잖아. 너의 엄마도, 동생도, 다른 친구들도 모두 너의 열성 팬 이잖아. 

 

나: 응, 맞아. 정말 감사한 일이지. 그래 그 외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는 건 더 이상 안 할래. 그래서 말인데 나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볼래. 내가 좋아하는 일들 중에도 밥벌이가 될 만한 것들이 여럿 있는 것 같아. 하나가 아니라 여럿 말이지. 정말 웃기는 일이네. 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해볼게. 하나는 나 작가가 되고 싶어. 그것도 소설가가. 두 번째는 번역하는 일을 해보고 싶어. 이번에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느꼈는데 나는 언어 특히 문자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 영어에서도 회화보다는 영문에 더 관심이 가더라고. 영어를 공부하면서 한국어에 대한 이해와 애정도 더 커지는 것 같았고.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번역이 내 관심사로 들어왔어. 세 번째는 주식 공부를 다시 해서 주식 투자를 해보는 거야. 꾸준히 경제 공부해서 내 실력대로 한다면 그것도 밥벌이에 있어 풍차 한 개의 역할은 해주지 않을까? 그리고 네 번째는 육아야. 이게 웬 밥벌이를 위한 일이냐고 할 테지만 나 이번에 알았어. 우리 아이들은 아직 돌봄을 필요로 하는 나이라서 맞벌이를 하게 되면 그에 따른 추가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게 될 거라는 거. 그 추가 비용 이상을 벌 수 없다면 그 일이 아무리 좋아하는 일일지라도 밥벌이는 안되는 거잖아. 육아와 가사 노동도 요즘은 금전적으로 가치 산정이 가능한 노동에 해당된다고 하니까 이것도 밥벌이에 해당된다고 생각해. 게다가 나 전업 주부 해보니까 육아가 재밌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워.

 

또 다른 나: 근데 너 혼자 너무 떠드는 거 아니야? 엄청 즐거워 보이는데? 이미 니가 답을 다 찾았네. 혹시 더 있어? 하고 싶은 일 말이야. 니 남편도 말했잖아. 해야 하는 일 말고, 하고 싶은 일 하라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데? 그거 하러 온 거잖아.

 

나: 응, 하나 더 있어. 나 주말마다 여행 다니고 싶어. 여기 오고 뭔가에 쫓기느라 여행도 잘 못 다닌 것 같아. 이제부터라도 뉴질랜드 구석구석 다 다녀볼래. 신난다.

 

또 다른 나: 근데 종 쳤어. 너 애들 데리러 갈 시간 됐다. 끝으로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너 그러니까 나 잘 챙겨. 너 그러니까 나에게 해가 되는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진짜 너니까.    

 

 


 그 해 나는 소설을 한 편 완성했고, 우리 가족은 캠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