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오성식은 나의 우상이었다. 나의 부모님은 내 공부에 압력도 없었을 뿐 아니라 별다른 지원도 없었는데 수학은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었는데 영어는 교과서만으로는 잘 안되었다. 그렇게 중학교 3년을 보내고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영어 듣기 평가는 늘 고역이었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떤 계기였는지는 몰라도 오성식이 진행하던 「굿모닝 팝스」를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매일 6시에 일어나 들을 자신은 없어서 엄마에게 졸라 오디오를 하나 장만했고, 매일 아침 6시에 녹음을 부탁드렸다. 그 길로 엄마는 감사하게도 2년간 매일 굿모닝 팝스를 녹음해주셨다.
변화는 1년이 지난 뒤 생겼던 것 같다. 영어가 재밌어지더니 영어 성적이 쑥쑥 늘어 영어 듣기 평가는 항상 만점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고3 수험 생활도 스트레스 크게 받지 않고 잘 보낼 수 있었다. 그런 나에게 최고의 우상이었던 오성식은 국내파였다. 그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었으나 그가 매우 활달하고 외향적인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대학에 입학하면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왕년에 영어 좀 했다는 잘못된 기억으로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뉴질랜드로 오기 위해서 아이엘츠(IELTS) 시험을 준비하면서 였다.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우선 영어회화 학원에 등록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아이엘츠 시험을 치렀고 그것으로 내 영어 실력에 대한 그릇된 인지를 인지하게 되었다. 이민 자신감이 쪼그라든 상황에서 영어를 잘하는 다른 한국 사람들을 보니 모두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영어 쓰는 모든 외국인은 외향적일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나는 기본적으로 수줍음이 많은 성격에다 '틀려도 괜찮아' 마인드를 아무리 가져보려 해도 잘 안되었다. 현장에 나가면 달라질 것이라고 애써 용기 내어 뉴질랜드에 왔다.
내 예상과는 달리 어학원에 다니면서부터 공부 방법에 대한 방황이 시작되었다. 어학원 선생님은 내 읽기와 쓰기 성적에 비해 듣기와 말하기가 잘 안 되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해했으며, 자막을 보지 말고 되도록 많이 들으라고 조언했다. 또한 영어를 잘하는 주변의 한국 사람들도 충고하기를 내가 말을 많이 안 해봐서 그렇다며 그냥 막 들이대라든가, 친구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들리지는 않고, 친구를 사귀어 보려고 해도 입은 안 떨어지고, 외국인 앞에만 서면 가마니가 되었다. 그것은 중년의 나이로는 퍽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어린아이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큰 아이는 한국 유치원에서 알파벳만 떼고 뉴질랜드에 오자마자 학교에 다녔고 6개월 되었을 때 집 근처의 다른 학교로 옮겼는데 그제야 적응을 한 듯 보여 안도했다. 그러나 큰 아이 스스로 말하길 전에 다니던 학교를 거론하며 그땐 자기가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고 평했다. 그 어린아이도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그 상황이 아기가 된 것 같았다고 하는데 하물며 어른은 어떠랴. 나의 생각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흔 살 수준인데 할 수 있는 건 여섯 살 수준도 안되니 나는 자꾸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서 뜯어고쳐지지 않는 내 성격을 원망했다. 내 성격으로는 영어의 달인 되기가 불가능한 것인가.
이제는 영어가 꼴도 보기 싫고, 영포자가 되어 그냥 여기서 낙오자가 되리라 하고 생각한 찰나 '영어 포기하려는 분들 제발 마지막으로 영화 100번 보기 해보세요.'라는 제목의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 이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실력은 제 자리고. 그냥 한 번 해보자.'라고 다짐한 후 솔직히 매일은 못했지만 그래도 놓지 않고 꾸준히 하는 영어 공부 방법으로 자리를 잡았다. 내가 쉐도잉으로 영어의 달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달인도 아닐 뿐 아니라 쉐도잉만 하고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영화 100번 보기를 통해 얻은 것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영화 100번 보기의 효과
- 겸손해진다: 나는 내 공부량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과가 그에 따라 주지 않는다고 실망했다. 100번 보기는 그런 나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같은 내용을 10번 보기도 어려웠는데 중요한 것은 10번이나 봤는데도 아직 안들 리거나 따라 하기는 무리구나 라고 느꼈다는 것과 아직 90번이 남아 있다는 생각은 '이 정도의 투입이면 이 정도의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당장.'이라는 조급증을 없애 주었다. 이것을 '내려놓기'라고 할 수 있을까?
- 발음과 억양이 체득된다: 같은 영상을 100번 보다 보면 내가 모르는 발음이나 혹은 안다고 생각했던 발음도 흡수 및 교정이 된다. 해당 문장의 억양도 자연스러운 습득이 가능해진다. 일부러 쉐도잉을 해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아도 100번 정도보다 보면 지루해서라도 그냥 막 입으로 따라 하게 된다. 노래를 계속 듣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는 것과 같다.
-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그러다 때가 되면, 그 표현이 아주 자연스럽게 툭 하고 튀어나온다. 즉 실제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100번 보기 프로젝트를 하기 전의 나는 한 문장을 말하더라도 어떻게 말해야 하나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맞는 표현인가 하는 의심에 자신감도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속도도 상당히 느렸다. 한 마디로 버퍼링이 많았다. 그러나 100번 보기 한 영상이 많아지면서 생각하지 않아도 그냥 튀어나오는 표현이 누적되어 많아지므로 버퍼링이 점점 줄어드는 효과를 봤다.
100번 본 영상 리스트
100번을 봐야 하기 때문에 어떤 영상을 볼지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분야일 때 100번 보기를 완성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렇지 않으면 100번 보기가 고역이 될 수 있다.
- Anne with an E, EP1: 나는 첫 영상으로 넷플릭스의 앤 시리즈의 에피소드 1을 골랐다. 워낙 빨강머리 앤을 좋아했던 데다 그즈음에 원서로도 이미 읽어서 관심과 흥미가 극에 달했을 때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앤의 대사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애정을 잃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 Lego Friends, EP1, 2 (old version): 첫 영상으로 본 앤은 러닝타임이 1시간 20분으로 너무 길다고 생각하여 짧은 것으로 하고 싶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볼 때 엿봤는데 짧고 쉽지만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표현들, 그러나 내 입에는 붙지 않은 표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어 20분짜리 영상 2개를 보는 것이 두 번째 프로젝트였다.
- Barbie Dreamhouse Adventures, Ep1: 레고 프렌즈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세 번째도 아이들 영상으로 하고 싶었다. 생각보다 내용도 유치하지 않고 교훈적이어서 좋았다.
- The Citizens Handbook Ep1~EP10: 잠시 너무 쉬운 주제를 선택한 것 같아 이번엔 어른용으로 갈아탔다. 해당 영상은 RNZ이라는 뉴질랜드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제작한 짤막한 영상으로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다. 뉴질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한편, 글 '나를 찾아가는 여행' 편에서 언급한 바 있는 MBTI와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자료를 발견했다. 그것은 MBTI 별로 영어 공부법도 달라야 한다(?)라는 취지의 영상이었다. 나의 MBTI 유형은 ISFP이기 때문에 ISFP 형에게 알맞은 영어 공부법을 각 지표를 기반으로 정리해보면 이렇다.
I 혼자 공부하는 것이 알맞음. 지도가 필요한 경우 1:1 코칭이 효과적임. 감정적으로 교류가 깊은 친구와 하는 것도 좋음.
S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선호하므로 상황극을 설정하여 공부하면 효과적임. 나무를 보는 경향이 있어 문법에 집착할 수 있으므로 주의할 것.
F 감정이입이 잘 되는 학습자료를 이용할 것. 학습목표가 인간관계에 있을 때 동기부여가 잘 되므로 친구를 사귀는 것을 목적으로 공부해보자. 감정의 기복에 따라 공부에 대한 회의감에 자주 빠지므로 계획표를 잘 이용해보자.
P 집중 시간이 짧으므로 변화를 자주 주어 흥미를 잃지 않도록 유의하자.
" rel="noopener" data-mce-href="http://
그렇다면 지금 내가 영어 공부로 하고 있는 것들이 나의 성향과 잘 맞는다고 스스로 확신할 수 있다. 나는 100번 보기 외에 원서 읽기와 필사를 병행하고 있다. 학습 자료로 만들어진 교재나 동영상은 감정 이입이 잘 안 되었는데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는 것은 감정 이입이 충분히 잘 되어서 그런지 흡수가 빨랐다. 나에게 맞는 학습법에 확신을 가지게 되니 더 이상 영어 공부 방법을 찾는 데 시간을 쏟지 않아 '~하지 마세요.' 하는 동영상에는 꿈쩍도 안 한다. 이쯤 되니 나 같은 사람은 외국어를 익히기 위해 꼭 그 나라로 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다. 학원도 포함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래의 동영상으로 인해 영어 공부 방법에 대한 고찰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 rel="noopener" data-mce-href="http://
요약하면 출력을 위해서는 입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는 것은 연습으로 하는 게 아니다. 말로 표출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노력과 시간의 투입이 필요하며 그것이 충분히 되었을 때 저절로 말하게 된다. 학원에서 '자 이제 말해 보시오' 하는 환경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다. 일반적인 학습은 약간의 스트레스가 자극이 되어 더 나은 성과에 도움이 되지만 언어를 담당하는 뇌는 이와 달라서 스트레스가 '0' 상태이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니 어떤 정신적 압박도 없는 방법으로 입력하는 것에 주력해야 한다. 그의 강연은 나에게 굉장히 매력적이었을 뿐 아니라 내 영어 인생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나는 더 이상 영어를 미워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하는 나도 미워하지 않는다. 가마니여도 괜찮다.
물론 나와 다른 방법으로 영어를 습득하신 분들도 많을 테고, 내 방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 테지만 나는 그저 나 같은 사람도 있다고 알리고 싶었고 나같은 사람에게 알맞은 방법을 소개하고 싶었다. 외국에 나와보니 영어 쓰는 외국인들 모두가 사교적이거나 외향적인 것은 아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말수가 적거나 수줍음이 많아 소극적으로 보이는 외국인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영어로 말하고 있으며, 아기들이 언어를 습득하는 시간과 방법이 저마다 다르듯이 우리 어른들도 외국어를 습득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그러니 남들의 의견에 개의치 마시고 자신이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꾸준히만 하시길 당부드린다. 나에게도.
'오만 가지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고 서점의 매력 (0) | 2021.03.26 |
---|---|
리얼리티 트랜서핑 실천하기 (0) | 2021.03.26 |
나를 나에게 들킨 느낌 (0) | 2021.03.21 |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0) | 2021.03.19 |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 미니멀리스트가 되면 생기는 일 (0) | 2021.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