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산책 길을 걸으면 보이는 중고 물품 가게가 있다. 호스피스(Hospice)라는 자선단체로 중고물품을 기증받아 자원봉사자들이 판매를 하고 있는 프랜차이즈 형태의 중고 물품 가게로 수익금은 전액 암과 같은 불치병 환자들을 위해 쓰인다. 실제 호스피스의 단어가 죽음이 가까운 환자들이 심리적·종교적 원조를 중심으로 풍족한 최후의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뜻이 있듯이 호스피스 케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뉴질랜드 전국에 125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 동네의 호스피스는 매장과 주 1회만 개장하는 창고를 포함하면 꽤 큰 면적을 사용하고 있다. 필요한 물건이 딱히 없어도 아이들과 함께 갈 곳이 마땅치 않을 때 자주 가는 곳이다. 뉴질랜드 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 무척 재미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는 서적 코너를 좋아한다. 그곳에서 만큼은 빈 손으로 돌아서기가 어렵다.
한국에서는 안타깝게도 동네의 중고서점이 많이 사라졌다가 알리딘 중고 서점이 오픈되면서 강남점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뉴질랜드로 오기 전 집 근처에 동네 중고 서점이 하나 남아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우리 가족에게 그곳은 아지트가 되었다. 책을 처분 중에 있어서 우리 집 남은 책의 대부분이 그 서점으로 가기도 했지만 영어 원서들을 발견하는 대로 싼 값에 구매해 여기 뉴질랜드까지 들고 왔다. 나의 컬렉션을 있게 해 준 시리즈를 다시 발견하게 된 곳이기도 하다.
중고 서점에서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행복감을 안겨준다. 새 책의 가격과 비교했을 때 저렴하게 구입해서가 아니다. 원하는 책을 서점에 가서 사 오거나 온라인으로 주문해서 받아보는 것은 보통 물건을 구입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기쁨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평소 원하던 책을 하필 그 날 그 중고 서점에 갔는데 그 자리에 딱 있어서, 내 눈에 확 띄었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나에게 중고 서점은 운명을 만나게 해주는 그런 곳이다.
그날도 방학 중인 딸아이와 단둘이 데이트를 하기로 하고 딸아이가 원하는 대로 호스피스로 산책을 가기로 했다. 딸아이도 모으는 시리즈가 있어서 틈만 나면 둘러보고 싶어 한다. 가는 길에 큰 아이가 내게 물었다.
"엄마는 오늘 뭐 살 거 없어?"
없다고 하자,
"책은 뭐 살 거 없어?"
하길래
"앤?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빨강머리 앤의 원서를 오디오 북으로 들으며 공부하고 있었는데 전자책 버전이라 불편한 점이 많던 참이었다.
"왜? 있을 수도 있지!"
그리고 몇 분 후, 거짓말처럼 책장을 둘러보던 큰 아이가 그 책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중고 서점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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