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남편도 직장인이었던 당시 연재되고 있던 회차를 실시간으로 보며 열광했던 웹툰이었다. 공감하는 부분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다른 분야의 다른 규모의 회사에서 일하는 모습을 간접적으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또 그것이 만약 직장에서의 일로 그쳤다면 저렇게 책으로 사 모으지 않았을 것이다. 바둑과 회사원을 종으로 횡으로 연결한 「미생」에는 인간, 인생, 인간관계, 처세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웹툰은 소장 가치가 있다고 남편과 나는 모처럼 한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당시 꼬꼬마 아기였던 딸아이가 어른이 되어 사회에 나갈 때 어쭙잖은 훈계나 두둑한 사업 밑천이 아닌 「미생」 전 권을 안겨 주기로 했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흘렀다. 뉴질랜드에 오면서 많은 책들을 처분했지만 이 전집은 가져와야 하는 더미에 속해 살아남았다. 뜬금없이 왜 또 이 책을 꺼내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바둑도 함께 공부해 보겠다고 야무진 각오로 시작했다. 바둑 초보 강의 몇십 강짜리를 유튜브를 통해 보았지만 여전히 매 화의 시작을 알리는 제1회 응씨배 결승전 5국에서 중국의 녜웨이핑 9단과 한국의 조훈현 9단이 둔 수에 대한 박치문 해설가의 기보 해설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바둑의 역사도 겉핥기 식으로 봤고, 바둑 용어와 규칙, 정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맛보기는 했으며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에 한국 바둑 역사에 획을 그은 영웅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1988년에 있었던 1회 응씨배에서의 조훈현 우승에 대한 의미를 기사와 영상을 통해 보고 나니 바둑 문외한인 나에게도 진하고 짜릿한 감동이 전해졌다. 그리고 그 대회를 복기하면서 해설하는 동영상을 보고 있자니 눈을 감고 소리만 들으면 바둑이 아니라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하여 논하는 인생 논설처럼 들렸다. 바둑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은 사실이었다.
10년 전 직장인으로서 읽었을 때와 세월이 흘러 직장을 나온 후에 읽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나와는 다른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의 삶이 나와 닮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서 무척 재미있었다. 친구들로부터 전해 듣는 이야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당시 아기를 낳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나에게도 곧 선 차장의 일이 닥칠 것 같았다. 그때는 워킹 맘의 내적, 외적 갈등으로 인해 결국은 회사를 그만두는 쪽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대세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도 커리어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육아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선 차장이 나 대신 그런 선택을 해주기 바랐었다. 그러면 나도 편하게 전업 맘으로 돌아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자신의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회사와 육아에 걸쳐져 있는 그 상태를 고수하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반감이 생겼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선 차장의 선택을 지지한다. 선 차장님을 칭찬하고 응원해주고 싶다. 대기업에서 여자로서, 워킹맘으로서 차장까지 올라간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구보다도 본인이 가장 힘들었을 테지만 누가 봐도 지옥길인데 본인에게 그 길을 감내할 힘과 열정이 있었다면, 그 힘과 열정으로 해냈다면, 그건 치하받아 마땅한 업적이다. 고단한 길라도 가겠다 하면 분명 그 길 어딘가가 본인은 좋은 것이다. 그 길이 본인이 행복한 길일 것이다.
'선 차장님, 그렇게 선 차장님이 좋은 길로 가시면 됩니다. 응원할게요.'
작년에 대기업에서 17년을 근속한 친구가 퇴사를 했다. 그 사이 그 친구의 두 딸은 중학생이 되었다. 이미 워킹맘이라는 극한 직업을 체험하고 퇴사를 단행했던 나는 일하고 있던 그 친구가 짠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독하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미생을 다시 보면서 그 친구에 대한 나의 평가를 고쳐 썼다. 그 친구는 오기로, 악으로 버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친구도 선 차장과 같이 일에서 얻는 성취감이라든가, 만족감이든가, 두 마리 토끼를 쥐고 곡예를 타는 것과 같은 짜릿한 긴장감에서 오는 재미가 필시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17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장하다. 친구야.'
회사에 큰 피해를 주고 있었던 부정 사건을 밝혀냄으로써 오 차장으로 승진한 오 과장으로부터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 결정적으로는 8권 중에 오 차장이 재무 부장과 힘 겨루는 장면에서 나오는데 들어주는 두 귀를 가진 오 차장은 이 싸움에서 승리한다. 피 흘리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 낸다. 이 장면에 앞서 작가는 계약직 사원의 말도 귀 담아 듣는 오 차장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바둑을 수담이라고도 한다.
한 판의 바둑엔 수많은 대화가 있고, 갈등이 있다.
시비가 생기고, 화해와 양보가 있다.
이기기 위해 목청을 높이는 수도 있고,
엄살을 부리는 수도 있다.
이기기 위해서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 말만 해서는 바둑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는 F. 모리아크의 글귀를 다음과 같이 첨부했는데 나는 모모를 떠올렸다. 나에게도 모모와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누군가에게 모모와 같은 친구가 될 수 있었으면...
"
그에게 있어 한 사람의 벗은
한 쌍의 귀를 의미한다.
마지막 9권에서는 오 차장이 동업 제의를 받고 퇴사를 고려한다. 그 지점에서 나의 두 번의 퇴사에 대해 복기해봤다. 나는 입사한 이래 3년 차 때부터 퇴사를 고민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을 꽉 채우고서야 회사를 나왔다. 반면, 여기에 와서는 근무한 지 3일 만에 회사를 나오고 말았다. 그때는 버텼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이 때는 버티지 못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땐 버티는 것이 나오는 것보다 더 할만한 일이었을 것이고, 이땐 버티는 게 버티지 못할 만큼 버거웠거나 버티는 것보다 좋은 일이 밖에 있었으리라. 같은 이유로 천 과장은 그곳에서 버티기로 했고, 김 대리는 그곳에서 나오기로 했다.
때로는 비합리적으로 보이고, 정치적 술수가 난무하는 것 같아 보이는 곳도 밖에서 보니 그곳이 가진 장점도 많아 보였다. 모든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것으로부터 배울 만한 것을 찾아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다시 사회생활이란 걸 하고 싶어 졌다. 더불어 계약직이 종료될까 봐 불안해했던 당시 장그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2년 간 배울 수 있는 최대한을 배워라. 그런 다음에 계약직이 끝나도 괜찮다. 다른 시작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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