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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가지 생각

나는야 공부쟁이

 나는 공부쟁이다. 커밍아웃한 지 얼마 안 됐다. 샌님이라는 둥, 헛똑똑이라는 둥의 이미지들이 싫어서 나는 내가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을 숨겨왔다. 하지만 나의 모든 것이 좋아지고, 나를 사랑하게 된 요즘 나는 내가 공부쟁이인 것도 좋다. 그래서 돌아봤다. 내 인생의 공부 역사. 그리고 혹시 누군가는 이 글에서 희망이나 작은 아이디어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소망에서 이 글을 쓴다. 회계사 합격 비법도 포함할 예정이었으나 쓰다 보니 길어져서 별도의 글로 작성하였다.

 

1. 나의 공부 역사

 유년시절

 초등학교 6년 내내 공부라는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유치원도 가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졸업사진도 못 찍었다고 한다. 공부가 뭔지 몰랐고, 다행히도 내 부모는 공부를 시키지도 않았다. 물론 집에는 책도 없었고,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 첫 받아쓰기에서 40점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20점을 받았던 적도 있다. 2학년 때는 구구단을 다 못 외워서 나머지 공부를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유년 시절을 놀기만 하면서 보냈다. 그래도 수업 시간만큼은 잠시도 딴 생각 하지 않고, 한 눈도 팔지 않고 열심히 들었다. 이유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생각을 듣는다는 것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강의 듣는 게 가장 재미있다.

 

 소년시절 

 그렇게 책 한 권 안 읽어보고, 알파벳도 못 떼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공부를 하나도 안 했는데 중학교 1학년 내내 성적이 상위권이었다. 순전히 수업 효과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에 사춘기가 왔고, 극심한 고독과 번민에 빠지게 된다. 나는 내 꿈을 '평범한 중산층 되기'로 정하게 된다. 나의 가정환경이 평균 이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는 공부라도 해야겠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반 아이들 중 몇 명이 와서 어떻게 공부하느냐고, 무슨 학원 다니느냐고 물어봤을 때 학원은 안 다니고 교과서로만 공부한다고 대답했는데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진짜였다. 집에서는 별다른 지원을 받는 것이 없어서 학교 수업과 교과서로만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안다.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과 책과 책상, 안전하고 안정적인 집, 환경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내가 누린 호사이자 행운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노력해서 이룬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학교 수업과 교과서만으로도 나는 당시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우리 동네에서 최고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청소년 시절

  동네에서 공부 잘한다 하는 학생들이 다 모인 고등학교에서 첫 짝꿍이었던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이 책도 안 읽어봤어?"

그 친구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모래톱 이야기」라는 책이었다. 청소년 권장 도서 몇 권 안에 드는 책이라고 했다.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뭐야, 다들 책 보면서 살고 있었던 거야? 책 보면서 공부도 한 거야?'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나는 그 날 일에 자극받아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것으로 고등학교 1학년을 다 보냈다. 덕분에 수학과 영어 성적은 꼴등이었지만 책 읽는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어디서 살고 있을지 모를 그 친구를 나는 내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1학년 마지막 수학 기말고사에서 만화 장면에서나 보았던, 시험지를 받아 들었는데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더라'하는 까막눈 체험을 했다. 똑같이 공부한 것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국어 성적만큼은 만점에 가까웠다. 당시 대학입시제도에 처음으로 논술이 도입되었는데, 반 아이들 몇 명이 논술 대비 독서 토론반을 만드는 중이었다. 그 친구들은 내가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을 눈치채고 나를 그 클럽에 끼워주었다. 그렇게 모인 여섯 명은 매달 책 한 권을 정하여 논술문을 쓴 후 모여 토론을 하고, 각자 써온 논술문을 바꿔 가지고 간 후 다음 달 모임에 첨삭을 하여 되가져와 글쓴이에게 돌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그 독서 토론 클럽을 위한 나의 한 달은 합의된 이달의 책 읽기, 제안할 차기 작 찾기, 다른 친구의 논술문 첨삭하기, 지난달 나의 논술문에 대한 친구의 첨삭 사항 확인하기가 동시에 이루어졌다. 치기 어린 나이일 수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체계적이고 건설적인 이런 모임을 자발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그때의 친구들과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중학교에 가서야 급하게 알파벳을 떼고 교과서를 읽는 것만으로 채워진 나의 영어 실력으로는 수능 대비 영어 듣기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리 만무하였다. 우연한 계기로 영어 방송 프로그램을 알게 되어 꾸준히 들었더니 나날이 영어에 대한 흥미가 커지고 영어 실력도 쑥쑥 향상되어 단 2년간의 영어 공부로 수능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반면 수학에서만큼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만 결코 수포자가 되지는 않았다. 중학교 시절 수학 교사가 되고 싶었던 만큼 1학년 기말 수학 시험을 망쳐 이과를 선택할 수 없게 되면서 수학 교사의 꿈은 거기서 멀어졌지만 수학 때문에 망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은 2년간 전략이 필요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고1 때 공통수학을 배우고, 고2 때 문과생들은 일반 수학 1을 배우고, 고3때는 별다른 수업 진도 없이 공통수학과 일반수학1을 복습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제때를 놓친 고1 공통수학은 고3 수험생 시절 따라잡기가 버거웠다. 그래서 나는 '선택과 집중' 전략을 채택하여 과감하게 공통수학을 포기하고 온전히 일반 수학 1에 올인하기로 했다. 공통수학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리므로 일반수학에서의 정답률을 90%로 끌어올려 70%만 받자는 계획이었다. 결과는 1999학년도 수능 시험에서 수학의 난이도가 평소 모의고사보다 높아 70%도 못 받았던 기억이 난다.  

 

 청년시절

 수학 성적이 기대보다 낮게 나왔지만 괜찮았다. 목표로 하고 있는 대학과 학과가 딱히 있지 않았다. 전공가 직업에 탐구를 할 기회가 제대로 없었다. 다만 IMF 위기로 하루가 멀다 하고 뉴스에 등장했던 은행원, 외환딜러들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그 직업이 경영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학교 도서관에서 찾아낸 책 「나는 나를 베팅한다」를 읽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수능 성적에 맞추어 모 학교의 경영학에 지원하고 합격하게 된다. 경영학을 선택하게 된 것은 천운이었다. 왜냐하면 1학년 1학기 회계원리의 첫 수업 시간에 회계학에 매료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학교 공인회계사 시험 준비 반에서 입실 시험이 있을 것이라는 공고를 보고 일단 시험을 보고 준비반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고 3년 정도 후에 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렇게 스무 살부터 오직 회계 길 외에는 안 보이는 외길 인생을 걷게 되었다.   

 

중년시절

 회계사가 되고 한 회계법인에서 1년간의 육아휴직을 포함하여 11년을 근무하는 동안 나는 나를 위한 공부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확실히 알았다. 내가 공부를 좋아했다는 것을... 다시 공부를 하는데 단언컨대 현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즐겁고 황홀했다. 일을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니 막노동꾼 출신으로 서울대 입학에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처럼 나에게는 공부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비자 연장을 위해 취업을 준비하면서 '어디 공부하고 시험 치르면 돈 주는 곳 없나?' 하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였다.

 

2. 내가 공부로 얻은 보상

 '운 반, 실력 반'인 시험과는 별개로 공부는 반드시 투자한 만큼 지식의 축적과 실력 향상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자주 좌지우지되는 다른 일들과는 달리 공부는 자신하고만의 싸움이다. 즉 나만 잘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하는 것 같다.

 

 더불어 공부하면서 얻게 되는 지식 외에 깨달음, 점차 뚜렷해지는 자기 견해 또는 인생관, 성실성, 참을성, 집중력은 공부가 주는 지식보다 더 큰 보상이며, 이는 다른 일을 할 때에 유용한 도구가 되어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이 애초에 메타 인지가 높아서 공부를 잘하는 것인지, 공부를 해서 메타 인지가 높아지는지는 모르겠으나 공부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과 같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도 그런 의미로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공부란 내가 몰랐던 것을 아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를 할수록 나를 더 많이 알게 된다. 

 

 내가 공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공부를 할 때 몰입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느껴본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 몰입의 즐거움은 그 어떤 것보다 달콤하다. 엔도르핀이 나와서 그럴까? 그렇기 때문에 공부 그 자체가 '운 반, 실력 반'인 시험 결과보다 중요하다. 또한 몰입의 즐거움을 가져달 줄 제대로 된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시험 성적 때문에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동기가 필요하다. 이것이 꼭 공부만의 효과가 아니라 어떤 분야이든 몰입할 때 성과가 높은 것은 당연하고 더 중요한 것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고 하므로 인생에서 반드시 자신이 몰입할 만한 대상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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