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마시면서 아이들 도시락에 오렌지를 까서 넣어주다가 오렌지 하나를 커피 잔에 퐁당 빠뜨렸다. 그 찰나 예전에 좋아했던 커피 생각이 떠올라 오늘은 나의 커피 인생을 회고해보고자 한다.
나의 커피 인생은 비교적 어릴 때 시작되었다. 우리 엄마는 커피믹스가 나오기 전부터 같은 브랜드의 커피와 프림을 2:2로 넣고 설탕도 2를 넣는 일명 '둘둘둘' 커피 애호가셨다. 엄마는 매일 한잔씩 둘둘둘 커피를 마셨고, 그 달콤하고 캐러멜 같은 향기가 좋았던 나는 엄마 앞에 알짱거려 마지막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곤 했었다. 그때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렇게 일찍 커피 맛을 알아버린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수험생이 된 후에는 당당하게 하루 커피믹스 한 봉지를 챙길 수 있었다. 매일 아침 책가방에 커피믹스 한 봉지를 넣고 학교에 가서는 급식으로 나오는 우유에 넣고는 마구 흔든 후에 홀짝홀짝 아껴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대학생이 되었고, 사먹는 커피의 맛과 멋을 알아버렸다. 등굣길 또는 학교 교정에서 누군가의 손에 들려 있는 커피숍의 로고가 크게 박힌 뚜껑 달린 종이컵을 보고 있노라면, '어른다움이란 저런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학교 앞 가장 싼 커피 로드 샵 중 하나였던 로즈버드에서 커피를 주문하여 들고 다니는 사치를 부렸었다. 그러다 어쩌다 이디야의 아이스 모카가 그렇게 맛있다는 소문을 친구들로부터 듣고 메뉴를 옮겨 탔다. 점심을 포기하고 아이스 모카를 사 먹을 정도로 푹 빠졌었다. 지금도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아이스 모카를 마실 때면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의 추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가 1999년과 2001년 그즈음이었다.
경제적인 자유와 여유가 생긴 직장인이 되었을 때, 매일 탕비실에서 커피 믹스를 3잔 정도는 마셔야 업무 스트레스가 풀렸다. 스트레스가 극심한 날은 다섯잔까지도 마셔본 적이 있다. 그것과는 별개로 가장 즐겨마셨던 커피는 매일 출근하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집어 들었던 우유회사에서 나온 냉장 카페오레였다. 그것은 일종의 출근 의식 같은 것이었고, 아침을 상쾌하게 시작하는 의식 같은 것이기도 했다. 큰 아이를 임신하여 배가 부른 채로 출근하던 때에도 포기하지 못했던 나만의 아침 의식이었다. 이 외에도 비 오는 날에는 꼭 할리스 커피에 가서 바닐라 라떼를 마셨으며, 무더운 여름날에는 슈퍼 커피의 오렌지 비앙코를 마셨다. 나의 커피 인생을 돌아보게 한 바로 그 커피이다. 커피와 오렌지의 조합이라니... 차가운 라떼와 함께 오렌지를 씹어 먹는 이 맛은 형언할 수 없으니 혹시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쯤은 드셔 보시길...
최근에 나는 커피믹스를 끊기로 결심하였다. 이유인즉슨 향수병이 극에 달했던 2020년 12월과 2021년 1월 두 달간 내가 마셔 없앤 커피믹스가 무려 300 봉지였다면 믿으시겠는가. 정확히는 아이들의 여름 방학 기간이었던 8주였으므로 일일 5.4 봉지를 마셨다는 계산이 나온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나서 어딘가 몸이 답답하고 불편함을 느꼈다. 옷이 작아져서였다. 좀처럼 몸무게를 재지 않지만 체중계를 꺼내어 올라가 보니 평소보다 8kg나 늘어 있었다. 아이들 방학 전에는 매일은 아니어도 요가와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었는데 방학 후 내 시간이 없어지면서 운동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한국 음식과 한식 재료의 결핍으로 인한 허전함을 추억의 커피믹스로 채우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탕을 과다 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한두 잔의 커피믹스야 상관없겠지만 눈에 보이고, 손에 닿는 한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통에 급기야 커피믹스를 집 안에 들이지 않기로 다짐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아이들이 개학하면서 다시 간간히 운동을 한지 두 달이 지나자 다시 8kg이 빠졌다는 것이다. 그 뒤로 라떼를 즐겨 마시고 있는데 나이가 들면서 유당불내증이라도 생긴 것인지 라떼를 마시면 소화가 잘 안되는 느낌을 받곤 한다. 그리하여 우유가 아닌 플랜트 베이스 우유들을 시도해 보았다. 아몬두 우유와 두유로 라떼를 만들어 마셔 보았다. 아몬드 우유는 특유의 떫고 기름진 맛이 내 취향에 맞지 않았고, 설탕과 소금이 들어 있지 않은 두유는 내 입맛에는 우유보다도 훨씬 맛이 좋았다. 그러나 커피와 섞이면 그 콩의 향이 커피의 향보다 더 강해서 마시기 어려웠다. 비건 코너에 있는 모든 우유들을 시도한 끝에 오트 밀크(귀리 우유)가 카페라떼에 넣을 우유의 대체제로 적격이라고 결론내렸다. 그 후로 나는 오트 밀크를 넣은 카페라떼에 정착하기로 하였다.
지금껏 살면서 고개가 숙여질 정도의 커피 마니아들을 많이 보아 왔다. 내 친구 중 하나는 커피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여 바쁜 회사 생활 와중에도 1년짜리 바리스타 과정을 수료했었다. 또 직장 선배였던 모 회계사는 커피에 대한 지식이 남달랐던 것이 인연이 되어 한 커피 전문 월간지에 커피 창업주들을 대상으로 한 세무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내가 본 사람 중에 커피에 대한 열정이 가장 많았던 분으로는 내 지인의 남편으로서, 그 댁에 초대되어 가는 날에는 식사 후 커피와 함께 하는 디저트 시간마다 커피 이야기를 한 시간은 거뜬히 할 수 있는 그런 분이었다. 원두 맛에 민감한 미각을 가지고 있어 집과 먼 거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단골 원두 가게에서 매주 갓 볶아낸 신선한 원두를 사 나르고, 그 마저도 일주일 간 원두 맛이 변할 것을 걱정하여 진공 통에 넣어, 마시는 순간 원두를 그라인더에 갈아 내려 마시는 그런 분이었다. 또한 직장 내의 커피머신이 형편없다고 끊임없이 불만을 제기하여 고가의 커피 머신으로 바꾸게 한 적도 있다고 하였다.
이들 앞에서 나는 커피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나 관심이나 지조가 있는 것도 아니요, 커피를 맛있게 잘 만드는 바리스타도, 전문가도, 미식가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히 나는 커피 애호가가 맞다. 커피가 건강에 해롭다는 기사가 뜨는 날이면 커피를 끊기로 결심하기도 하지만 그런 날엔 아침에 새벽 기상을 해낼 수가 없었다. 어차피 일어나더라도 커피 한 잔이 없다면 일찍 일어나는 즐거움도 없다는 생각을 비몽사몽에도 했던 모양이다. 또 카페라도 가게 되면 이미 집에서 충분한 양의 커피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고 신선해 보이는 스무디나 상큼하고 시원해 보이는 이름 모를 음료들의 유혹을 예외 없이 뿌리치고 항상 커피를 고르는 걸 보면 나는 커피 애호가이자 커피 산업의 장기 고객이라 해도 큰 손색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