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후조리원 동기들이 모인 단체 카톡방에서 「산후조리원」이라는 드라마 소식을 전해 듣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드라마의 제목이 적나라하게 「산후조리원」이라는 것이 첫 번째 웃음 포인트였고, 드라마의 내용이 말 그대로 산후조리원 이야기라는 것이 두 번째 웃음 포인트였다. 아직까지 그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지만 벌써 오래전 일이 되어 버린 나의 출산과 산후조리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됐다.
나는 두 번의 출산과 산후조리를 겪었다. 첫 번째는 9년 전에, 두 번째는 5년 반쯤 전이었다. 오래된 일 치고는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산고는 제외하고 말이다. 두 번의 출산과 산후조리로부터 얻은 교훈은 엉뚱하게도,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당연하게도 '소신대로 하기'였다. 다시 말해 출산과 산후조리에 있어서도 정답은 없었고, 소신만이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이다. 나의 출산과 산후조리 후기를 통해 내가 그러한 결론을 내리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아이를 잉태하고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산부인과에 다녔다. 작은 산부인과였지만 2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다니려면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에서였고, 무엇보다 진통이 시작하면 재빠르게 산부인과에 당도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산부인과에는 남자 원장 선생님 한 분과 여자 선생님 두 분이 계셨다. 아이를 갖기 전부터 반드시 산부인과 진료는 여의사에게 받고자 하는 고집이 있었다. 이유는 남자 산부인과 의사는 동병상련할 것 같지 않다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진료일에 대기실에서 대학 선배를 만났다. 그 선배는 한 달 전 첫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 검진을 나온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처음 만나는 거라 반갑기도 했고, 그곳에서 만난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선배는 남자 원장님이 담당의였다고 말하며, 그를 일명 아이를 많이 받아 본 베테랑이라 칭했다. 그간 못 나눈 안부를 나누고 연락처도 몇 가지 업데이트를 하고 헤어졌다. 다음번 진료를 갔을 때였다. 대기자 명단을 확인할 수 있는 화면에 여자 선생님 두 분 밑으로 대기 중인 예비 산모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회사에 들어가기로 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고, 지난번 만났던 선배의 말이 떠올라서 남자 원장님 앞으로 대기했다. 처음으로 만난 남자 산부인과의였지만 대번에 왠지 모를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임신 초기의 심한 입덧이 끝나고 나니, 늘 불안했었다. 과연 뱃속의 아기가 잘 있는 것인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선생님은 나의 마지막 진료까지 안도감을 주셨다. 정작 출산 당시에는 세 분 중 어떤 선생님이 들어오셨는지 기억이 안난다. 무통 주사 없이 자연분만을 하였지만 6시간의 산고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그저 태어나서 느껴 본 가장 맹렬한 신체적 고통이었다는 것과 아이가 나오자마자 순식간에 그 고통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둘째 계획도 거리낌 없이 했던 것 같다. 둘째 임신 중에도 역시 같은 산부인과의 같은 담당의에게 진료를 받았다. 둘째는 산고도 무척 짧았는데 그 이유는 아이를 낳을 때 배에 힘주는 것이 아니라 엉덩이에 힘을 주어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경험은 자산이다. 단 두 번 힘주어 둘째를 낳았다.
앞서 아이를 키운 선배 엄마들은 흔히 아이가 자라면서 각 단계마다 엄마로서 맞이하게 되는 과제도 달라진다고 말했다. 그래서 육아는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결코 편해지지 지도, 쉬워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의 육아를 돌이켜보니 정말 맞는 말이다. 매번 새로운 과제가 생긴다. 그 과제가 걱정이 되는 문제이거나 불편한 문제일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이 임신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임신 초기에는 입덧 때문에 고생하거나 쏟아지는 잠 때문에 고생을 하기 일쑤이다. 아무런 증상이 없는 중기에는 몸은 다소 편한 편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하다. 아이가 잘 크고 있는 것인가 하고 불안하지만 진료 주기가 한 달로 늘어나 병원에 자주 가볼 수도 없다. 그러다 후기가 되면 걷는 것도, 앉아 있는 것도, 자는 것도 힘들어진다. 다태아를 임신한 경우에는 다리가 퉁퉁 붓고, 숨도 잘 안 쉬어진다고 하니 두 배, 세 배 이상의 고통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게다가 출산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출산에 대한 공포는 점차 커진다. 방앗간 드나들 듯했던 임신, 출산, 육아 카페에서는 '이제는 방 빼고 싶어요.'라는 글에 항상 '그래도 넣고 다닐 때가 편한 거예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낳아보니 정말 그랬다.
첫 아이를 낳고, 나는 산후조리를 집에서 했다. 여러 좋지 못한 사건들의 보도를 보고 산후조리원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산후 도우미를 적극 추천했던 누군가의 조언도 큰 몫을 했다. 집으로 오셨던 산후 도우미님(흔히 '이모님'이라 부른다)은 친정 엄마와도 죽이 잘 맞으셔서 좋았다. 사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지라 좋은지, 나쁜지 잘 몰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모님의 친정어머니가 수술 후 회복 중이셔서 이모님이 직접 요양을 해드리기로 하셨다며 중도 하차를 내게 고하셨다. 그리하여 총 4주 중 남은 2주는 다른 이모님이 오셨다. 새로 오신 이모님은 어딘가 모르게 풍겨오는 분위기가 차가울 뿐 아니라 본인이 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서도 냉담했다. 예를 들면, 산후 서비스에 포함되어 있던 청소가 산모와 아기 방으로만 되어 있다며 안방만 청소하셨다. 아기와 내가 거실에서 주로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산후 마사지가 매일 제공되는 서비스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마사지를 하면서 직접적으로 얘기하기를 '전문 마사지사가 아니기 때문에 이걸로는 의미 없다.'며 대충 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전의 이모님의 에너지 넘치는 손길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났다. '산후 마사지받는 게 회복하는 데 도움이 무척 많이 된다'라고 하시며 열심히 해주셨던 전 이모님이 그리웠다. 두 분의 이모님을 대하고 나니 나도 모르게 우열을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8월 무더위 속에서도 2주간 샴푸와 샤워를 하지 않은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4주간의 나의 첫 산후조리가 끝이 났다.
둘째의 산후조리는 달라야 한다. 이것 역시 경험을 통해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첫째의 첫 번째 산후 도우미님이 마음에 무척 들었기 때문에 둘째의 산후조리를 의뢰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사이 친정 엄마가 산후 도우미 제도가 개선되면서 좋아진 조건을 활용하여 산후 도우미 교육을 수료하시고, 산후 도우미로 활동하시게 되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친정 엄마는 나의 산후조리는 당연히 본인이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나도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집에서 하는 둘째 아이의 산후조리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큰 아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갓 태어난 신생아에 비하면 큰 아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리고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아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둘째를 안고 퇴원한 첫 째 날, 3일 만에 큰 아이를 보니 좋았다. 친정 엄마가 둘째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큰 아이를 안아 주거나, 냉장고 문을 열어 요거트를 꺼내어 주거나 하고 있었다. 둘째 날, 나는 두려워졌다. 이러다 나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산후조리를 망칠 것만 같았다. 생각만 해도 손목이 시큰거리는 것 같았다. 눕혀놓기만 하면 울어재끼는 둘째 아이와 놀아달라는 첫째 아이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친정 엄마와 남편을 눈 앞에 두고 나는 눈물을 왈칵 터트리고 말았다. "나 산후조리원으로 보내 줘. 으앙" 남편은 급히 이곳저곳 산후조리원의 빈자리를 찾아 전화를 걸어댔고, 당장 들어갈 수 있다는 산후조리원으로 그날 바로 입소했다. 앞으로 2주간이나 떨어져 있어야 할 큰 아이에게는 미안했지만 두 눈 질끈 감고 들어갔다. 그곳에서 나는 지금도 단체 카톡방에서 많은 이야기를 공유하는 7명의 산후 조리원 동기들을 만났다. 산후조리원은 내가 모르고 있었던 천국이었다. 그 산후조리원은 사실 고급진 곳도 아니었다. 밥이 특별히 맛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를 구원해 준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산후 조리원 동기들을 만나게 해 준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이제 아이가 둘이 되었으니 또 얼마나 더 큰 어려움들이 있었을까? 아이가 첫돌이 되기 전까지 외식은커녕 집에서도 느긋하게 제대로 된 식사 한 번을 할 수 없었고, 남편과 나는 늘 수면 부족에 시달렸었다. 그러한 육아로 인한 불편함은 아이가 자랄수록 다른 불편함으로 옮겨갈 뿐이었지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다. 둘째까지 더해진 이후에는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이 발생했다. 앞서 말한 산부인과에서 우연히 만났다던 그 대학 선배를, 이사를 하고 퇴사를 하고 둘째를 낳고, 동네에서 우연히 또 만났다. 알고 보니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선배는 둘째를 낳고 육아 휴직 중이어서 몇 번 왕래할 수 있었는데 그 선배의 육아 태도가 투덜대는 나와는 사뭇 달랐다. 내가 육아의 늪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우리 아이들이 상대적으로, 비교적 까다로워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하자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아기들이 다 그렇지." 그렇게 말했던 선배는 육아 휴직을 마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가 힘들지 않느냐는 나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워킹맘이 다 그렇지." 선배의 그 한마디는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 아이들 일로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가도 '아직 아이들이잖아. 아이들이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면 화가 사라진다. 그리고 어려움을 훨씬 능가하는 큰 기쁨이 있기에 이 모든 것이 괜찮고 당연하기도 하다. 아이들이 태어난 이후 나도 새로 태어났다. 아이들은 사랑에 대한, 나를 낳아준 부모에 대한, 사람에 대한, 동물에 대한, 지구에 대한 나의 생각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그래서 나는 이미 아이들에게 많은 빚을 졌고, 그런 아이들에게 많이 감사하다.
임신과 출산, 육아 그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았으며, 정답은 없었다. 수시로 들락날락했던 카페에서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그들의 이야기였다. 나의 출산은 달랐고, 두 번째는 또 첫 번째와 달랐다. 산후조리도 남들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나를 둘러싼 변수들을 나에게 맞게 고려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정답은 없었고, 내가 선택한 모든 것들이 나에게는 옳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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