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국어 소설을 읽었다. 여기, 뉴질랜드의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었다.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읽기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글의 형식이 독특했다. 대화체가 지문에 섞여서 표현되어 있어서 따라가기 어려웠다. 그러다 작가가 누구지 하는 생각에 앞뒤 표지를 살폈다. 그의 저서 중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눈길이 머물렀고 한 친구가 떠올랐다. 까마득히 오래전에 그 친구가 그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고 나에게 추천했기 때문이다(이제 보니 표절 논란이 있어 유감이지만). 워낙 말수가 적은 친구이고, 책을 나에게 추천한 것은 그것이 유일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덕에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계속 읽을 수 있었다. 인간의 적응력은 참으로 빨라 독특해서 읽기에 방해되었던 그 문체에도 수십 페이지 이내에 익숙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으면서 하루키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그가 자신은 클래식 음악 듣기를 하루 일과의 루틴으로 한다는 기사를 보기 전에도 말이다. 허구의 인물과 허구의 사건이 등장하는 것이 소설이지만 소설을 통해 그 소설가에 대해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법이다. 박민규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기도 하고,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지만 그는 1980년대에 이미 성인이었을 거라고 결론 내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시대엔 그랬다는 말을 그렇게 호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을 좋아할 것이라고 추론하기에 충분할 만큼 많은 곡들이 등장한다. 음악에 대한 조예는 없지만 나 역시 좋아하는 음악의 폭이 넓은 터라 소설에 등장하는 곡들을 지나칠 수 없어 리스트를 만들고 모두 들어 보았다. 중학교 시절 비틀즈 앨범을 듣고 또 들으면서 미셸을 가장 좋아했었는데 이 곡이 포함되어 전율을 느꼈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 든 이유가 이거였을까? 이 소설이 만약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아마도 음악이 주가 되는 영화가 될 것 같았다.
1.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모리스 라벨
2. Baby one more time, 브리트니 스피어스
3. Tonight I celebrate my love, 로버타 플랙
4.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로버타 플랙
5. Green green grass of home, 탐 존스
6. Delilah, 탐 존스
7. 킬리만자로의 표범, 조용필
8. Lucy in the sky with diamond, 비틀즈
9. Heart of gold, 닐 영
10. Something, 비틀즈
11. Billy jean, 마이클 잭슨
12. Summer time, 스모크 온 더 워터 & 재니스 조플린 (스모크 온 더 워터의 기타 버전은 찾지 못했다)
13. Lipstick traces, 유에프오
14. Black bird, 비틀즈
15. (가장 조회수가 많은 'Comfortably numb'를 들었다), 핑크 플로이드
16. 켄터키 옛집, (김상희 목소리로 들었다)
17. Michelle, 비틀즈
18. Love me tender, 엘비스 프리슬리
19. Blue light Yokohama, 이시다 아유미
20. 어미 거위의 두 번째 곡 난쟁이, 모리스 라벨
21. Strawberry fields forever, 비틀즈
22. ('Wipe out'을 들었다), 벤처스
23. (오랜만에 'Kokomo'를 들었다), 비치보이스
24. ('You really got me'를 들었다), 킹크스
25.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 살바토레 아다모
26.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 슈베르트
27. 송어, 슈베르트(조수미의 목소리로 들었다)
28. 짐노페디, 에릭 사티(1,2,3 중 1과 3을 정소윤의 연주로 들었다)
29. 겨울 나그네, 슈베르트
30. Blowin' in the wind, 밥 딜런
31. Don't think twice, it's all light, 밥 딜런
32. A hard rain's a-gonna fall, 밥 딜런
33. 안단테 마에스토소, (차이코프스키 호두까기인형 중 파 드 되를 손열음 연주로 들었다)
소설의 줄거리라든가 당황스러운 전개라든가 하는 흥미 요소가 많았지만 나에게는 요한의 대사들이 깊이 와닿았다. 그동안 고민해왔던 것과 최근까지도 고민하고 있었던 화두들이 다시 내 인생에 던져지는 듯했다.
인간은 대부분 자기와 자신일 뿐이니까. 그래서 이익과 건강이 최고인 거야. 하지만 좀처럼 자아는 가지려 들지 않아. 그렇게 견고한 자기, 자신을 가지고서도 늘 남과 비교를 하는 이유는 자아가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끝없이 가지려 드는 거야. 끝없이 오래 살려하고... 그래서 끝끝내 행복할 수 없는 거지.
(알랭 드 보통이 말한 한국인이 느끼는 불행감이 행복으로 가는 그 시작점이 된다고 했던 말에 동의하며 요한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역시나 결국 여당과 독재자에게 그 이익이 돌아간다 해도 그해 가을을 살았던 사람들 중 누구보다 큰 이익을 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아무런 토를 달지 않는 것은 요한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때문이다.)
(전략) 현실적으로 살고 있다 다들 생각하겠지만, 실은 관념 속에서 평생을 살 뿐이지. (중략) 그러니까 미리, 그 외의 것을 상상하지 않고선 인간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어. (중략) 그래서 신은 단 하나의 유일무이한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신 거야. (중략) 바로, 사랑이지. 사랑은 상상력이야. (중략)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그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주로 동의하기는 하지만 가끔 동의하지 않기도 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겹쳐 보였다.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동의한다. 관념에서 산다는 것은 수록 곡 리스트에서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와 결이 완전히 일치한다. 인생에 대한 화두를 이리로 저리로 궁리해보아도 결국 '사랑'이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런 이유로 내 눈에는' 이 소설에서 '사랑'에 방점이 찍힌 것으로 보였다. 사랑에 대한 상상력을 바꿔 말하면 콩깍지라 할 수 있겠다. 그 신세계에서 벌어졌던 말도 안 되게 달콤하고 행복했던 과거의 기억은 콩깍지가 벗겨진 후에도 유효해서 제법 알콩달콩 살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요한과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나' 와는 달리 내가 20대를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없이 보냈던 이유가 사랑이라는 상상 속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고 자족해본다.)
보이지 않는 선두에서 하멜른의 피리를 부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있는가...
(요한이 그렇게 되고, 요한의 세상에 대한 관념은 '나'에게로 옮겨갔다. 요한이 읊조렸을 법한 세상에 대한, 인생에 대한 질문과 질책을 '나'가 하고 있다. 그나저나 '나'의 이름이 나왔던가?)
자본주의의 바퀴는 부끄러움이고, 자본주의의 동력은 부러움이었다.
고대의 노예들에겐 노동이 전부였다. 하지만 현대의 노예들은 쇼핑까지 해야 한다. 대학을 나와야 하고, 예뻐지기까지 해야 한다. 차를 사야 하고, 집을 사야 한다. 이런 내가, 대학을 가는 순간 세상의 평균은 또 한 치 높아진다.
(이제 스무 살이 된 '나'는 삶에 대해 고뇌하는데 나의 두 볼에는 뜨거운 눈물이 자꾸만 자꾸만 흘러내렸다. 나는 왜 아직도 방황하는가. 왜 나만 그런 것 같은가.)
끝으로, 별책부록처럼 달려 있던 부분에 숨어 있었던 반전에 놀라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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