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권의 오래된 책을 읽었다. 셰익스피어 단편들을 읽었으니까 오래된 고전을 읽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1984년 초판, 1985년의 제9판 발행본을 읽었으니 책 자체가 퀴퀴한 냄새가 나도록 오래되었다는 뜻이었다.
셰익스피어 단편집 안에는 「베니스의 상인」, 「말괄량이 길들이기」, 「한여름 밤의 꿈」, 「헛소동」, 「십이야」, 「태풍」이 수록되어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없었다.
이 책에서 세 가지 매력을 발견하였는데 첫째는 오래된 출판물을 읽는 것으로부터 말투와 글투의 시대적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고전을 읽는 것으로부터 한국이 조선시대였을 당시 영국의 시대상(물론 희곡은 허구이지만 당연히 당시의 현실감을 살렸을 것이다.)을 을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셰익스피어의 입담과 재담(희곡이기 때문에 모든 문장이 대화와 방백이었다.)을 등장인물의 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게 멋지거나 우습거나 타당한 대사가 나올 때마다 사진 촬영을 하였는데 세어보니 총 34컷이나 된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나 몇 장면만 추려보고자 한다.
「베니스의 상인」 중에서
#1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 확실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 포오샤는 위와 같이 생각하였다. 포오샤의 대사로부터 포오샤가 절제의 미학을 알고 있는 현자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포오샤는 곤경에 처한 예비 신랑감(바사니오)을 기지를 발휘하여 뒤에서 모르게 구해준다.
#2
제대로 된 선택으로 포오샤를 신부로 얻게 될 바사니오가 포오샤의 초상화를 보며 읊은 대사이다. 웃음이 피식 나올 정도로 달콤하여 혼자 읽기 아쉬운 마음에 남편에게도 읽어 주었다. 덧붙여 말하기를 여심을 사로잡는 대사들은 모두 여성 작가로부터 나온다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다고 했다. 셰익스피어가 이렇게 여심을 제대로 흔드는 작가였다는 것을 새삼 느끼며 로미오와 줄리엣이 떠올랐다.
#3
포오샤가 바사니오에게 정식으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표현한 앞부분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들었던 감정을 고스란히 떠올리기에 충분하다고 그러나 그 감정을 저렇게 표현한 셰익스피어는 정말 언어 천재인가 보다 생각하던 중 '다만 다행스러운 것은...'이라고 시작되는 문장을 읽고는 폭소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4
포오샤와 그녀의 시녀인 네리사가 은밀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돌아오면서 나누는 대화이다. 이렇게나 간결한 대사에 진리를 두 개나 품고 있음에 많이 놀랐다.
「말괄량이 길들이기」 중에서
#5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형식은 특이하다. 연극 속에 연극이, 또 그 연극 속에 또 다른 연극이 들어 있는 셈이다. 한 영주가 술 취한 이를 골려 주기 위해 연극을 하기로 하는데 그 술 취한 이의 안주인 역할을 할 시녀를 두고 하는 대사이다. 눈물 연기를 할 수 없거든 양파를 이용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문장력에 또 한 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역자의 번역 실력도 한몫을 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6
이제 연극 속의 또 다른 연극 장면이다. 영주는 술 취한 이를 속이는 연극을 모의하던 중에 우연히 자신의 집을 지나던 극단이 하룻밤 신세의 청을 청하자 흔쾌히 받아들이며 술 취한 이 앞에서 연극의 상연을 부탁한다. 그 연극의 내용이 캐더리너라는 말괄량이를 길들이는 내용인데 '술 취한 이' 역시 말괄량이므로 참으로 적절한 연극 속의, 또 그 연극 속의, 또 다른 연극이 아닌가. 그 또 다른 연극 상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루센쇼의 하인이 공부를 해보겠다던 루센쇼에게 조언하는 장면이다. 제법 각 학문의 특징에 대해 두루 꿰고 있는 것처럼 장황하게 말하는 장면이 우스워서 웃다가 '흥 없는 곳에 이익이 없다니까요. 잘라 말하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을 공부하세요.'라고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정색을 하고 사진으로 저장했다.
#7
페트루키오는 말괄량이 캐더리너를 길들이는 방법으로서 캐더리너보다 더 한 망나니 같은 행동을 보인다. 이를 지켜본 하인들이 나눈 대화이다. 결국 캐더리너는 꼬리를 내리고 좋은 아녀자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다른 부인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으로 연극이 끝이 난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는 반어적으로 들렸다. 캐더리너는 '남편은 하늘, 아내는 땅'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속뜻은 '하늘이고자 하는 남편을 하늘로 떠받들어 주면 만사가 태평하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한 연극 속의 그 연극은 그 또 다른 연극이 끝난 후에 어찌 되었는지 소식도 없이 그 또 다른 연극의 끝과 함께 끝이 나 버린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실수였을까?
「한여름밤의 꿈」 중에서
#8
사실은 라이샌더와 허미어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였고, 드미트리어스는 허미어를 짝사랑했고, 헬리너는 드미트리어스를 짝사랑했고, 허미어와 헬리너는 친구 사이였다. 헬리너를 불쌍히 여긴 요정의 왕, 오우버런은 요정 퍽을 시켜 드미트리어스가 잠든 사이에 사랑에 빠지게 하는 꽃즙을 떨어뜨리게 하여 눈을 떠 처음으로 헬리너를 만나게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퍽이 라이샌더를 드미트리어스로 착각하는 바람에 라이샌더가 헬리너를 사랑하게 되어버린다. 이런 난장이 되어 버린 판에서 네 사람이 다투는 장면이다. 어젯밤만 해도 허미어를 사랑했던 라이샌더는 그녀를 향해 '난장이... 키 안 자라는 풀이라도 달여 먹은 게지'하고 욕설을 퍼붓고 있는 것이며, 라이샌더와 드리트리어스는 당초 허미어를 두고 연적이었는데 이제는 헬리너를 두고 연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네 사람이 다투는 장면은 몇 페이지에 걸쳐 계속된다.
#9
이렇게 일이 꼬여버린 것을 노여워 한 요정의 왕 오우버런은 퍽을 책망하며 되돌려 놓을 것을 명령하고, 퍽은 모두 잠이 들기를 기다린다. 그리하여 네 사람이 각각 잠이 드는 장면이 각각 각자의 대사로서 묘사되는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잠의 효능'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법이 일어나는 것도 잠을 통해서이고, 마법에서 깨어나는 것도 잠을 통해서라는 점에서 잠은 모든 것을 일어나게 하기도, 해결하기도 한다는 또 다른 진리가 포착되었다.
#10
셰익스피어는 이 연극 안에도 또 다른 연극을 집어 넣었는데 이쯤 되면 셰익스피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밖에 없으리라. 퍽이 마법을 풀어 네 사람이 원래 자리로 돌아온 후 예정되었던 연극의 상연에 앞서 그 연극에 대한 평가다. '환희와 비극적인 것! 지리하고도 간략하다! 그런 더운 얼음이란 말과 같구나. 시커먼 눈이란 말 같고...' 역설법의 향연이다.
#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을 보기로 한 이유다. '말이 적은 순진한 마음이 말이 많은 것보다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하오.' 이 마지막 문장이 왠지 모르게 나를 위로했다.
#12
그 또 다른 연극이 끝나자 요정 퍽이 등장하여 말한다. 실수가 있었다면 너그럽게 용서해달라고. 마치 앞서 퍽이 했던 실수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과 퍽의 입을 빌려 연극 자체의 실수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을 병합하는 기술을 쓰고 있다. 게다가 또 잠과 꿈의 기능을 이용했다. 대단하다.
「헛소동」 중에서
#13
함께 비혼을 선언했던 클로디오가 사랑에 빠진 여인에 대하여 베네딕에게 의견을 묻자 베네딕은 대답한다. '높이-작고', '찬란한-가무잡잡하고', '크게-작아'라고 대비를 이루자 평가가 강렬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달리 생겼더라면 못났을 뻔했겠고, 지금같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좋아하지 않았을 거야.'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래서 좋다는 것인지..... 농을 치고 있는 것이다.
#14
함께 비혼을 하기로 한 친구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하고 싶어 하자 베네딕은 결혼은 무덤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한다.
#15
한편, 또 다른 비혼주의자인 비어트리스 역시 결혼에 관한 한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베네딕과 비어트리스는 만날 때마다 티격태격하지만 베네딕이 #14에서 지목한 그 여자의 사촌이 비어트리스이다. 히어로우는 비어트리스의 사촌 동생이자 클로디오가 사랑에 빠진 여인이다. 청혼을 받기로 되어 있는 사촌 동생 히어로우에게 비어트리스가 구혼과 결혼과 후회를 춤으로 묘사하고 있다. 오만과 편견이 생각나서 셰익스피어 희곡 모음집에서 이 희곡을 가장 재밌게 읽었다. 과연 명불허전 로맨스 작가다.
#16
그런 베네딕과 비어트리스가 좋은 배필이 될 거라고 판단한 주변 사람들이 힘을 모아 베네딕이 비어트리스를 좋아하도록, 비어트리스가 베네딕을 좋아하도록 분위기를 몰아간다. 그러는 바람에 베네딕은 위와 같이 생각을 180도로 바꾼다. '세계는 인구를 불려야 해. 내가 총각으로 죽겠다고 한 건 결혼할 때까지 살 줄 몰랐기 때문이야.'라고 합리화한다.
#17
베네딕과 비어트리스가 결혼하는 것으로 극은 막을 내리는데 그전에 야경꾼 둘의 '유행'에 관한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1500년대에도 유행은 말썽이었던 모양이다.
「십이야」 중에서
#18
바이올라는 공작을 사모하여 공작의 지척에 있고자 남장을 하고 하인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공작은 올리비아에게 구애하고자 바이올라를 심부름꾼으로 보냈고, 공작의 계속된 구애를 거절하고 있었던 올리비아는 남장을 한 바이올라에게 반하고 만다. 일이 이렇게 꼬이자 바이올라는 '시간아, 이 해결은 네가 해줘야겠어. 얽히고설켜서 난 좀체 풀 수 있을 것 같지 않구나.' 하고 시간에게 맡긴다. 많은 문제들이 잠과 시간에 의해 해결된 것을 봐왔고, 바이올라의 문제 역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쌍둥이 오빠가 돌아오면서 모두 해결된다.
「태풍」 중에서
#19
밀라노의 공작이었던 프로스페로는 동생의 모함으로 딸 미랜더와 함께 쫓겨나 무인도(정확하게는 마녀와 그녀의 아들이 살고 있었던 섬)에서 살게 된다. 프로스페로는 12년 동안 혼자서 마법학을 수련하면서 지낸다. 프로스페로의 '행 불행이 겸했지.'라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내가 겪었던 모든 나쁜 일은 좋은 점도 가지고 있었다.
#20
'이 커다란 지구도, 그래, 지구상의 삼라만상도 마침내 용해되어, 지금 사라져 버린 환영처럼, 흔적도 남기지 않은 거야. 우리도 꿈과 같은 물건이어서, 이 보잘것없는 인생은 잠으로 끝나는 거지.'라는 프로스페로의 말에 장자의 호접지몽을 떠올렸다. 셰익스피어의 세계관을 살짝 엿본 것만 같았다.
끝으로 이 발행본의 또 다른 재미는 각 희곡에 대한 역자들의 해설과 평가가 곁들여져 있고, 가장 마지막에 셰익스피어 연보가 꽤나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연보를 읽어보니 셰익스피어가 살던 당시에도 전염병이 자주 창궐하였으며, 그로 인해 극장이 폐쇄되었던 것이 여러 차례였다. 작금의 코로나 상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다른 시대를 느끼게 해 줄 뿐 아니라 불변하는 진리를 깨우치게도 해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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