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경유로 가지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던 이 책을 어째서 집어 들었던 것일까? 누군가의 손을 거쳤던 듯 몇 군데 하이라이트가 되어 있었다. '설마 내가 그랬을까?'라고 하기엔 그 울림이 너무 크고 새롭기만 하다. 1995년에 한양출판에서 발행된 이 책에는 유길준의 머리말에 앞서 옮긴이의 글이 있었는데 그 부분에서 이미 나는 책 「서유견문」에 매료되었다.
옮긴 이의 글에 따르면 이 책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유학생이었던 유길준이 서양의 문물을 한국에 처음 소개했다는 것에 이미 큰 의의가 있다. 또한 이 책은 한국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저술이라고 한다. 물론 조사 정도만이 한글이고 전부 한자이기 때문에 이를 다시 전부 한글로 옮겨 준 이가 있어야 나 같은 사람이 읽을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당시로서는 대단히 획기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었나 보다. 이는 유길준이 애초에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유길준은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 글자와 한자를 섞어 쓰고, 문장의 체제는 꾸미지 않았다. 속어를 쓰기에 힘써, 그 뜻을 전달하기를 위주로 하였다."
-서유견문, 한양출판 발췌
1900년 초까지만 하더라도 '한글'이라는 단어가 없었다고 한다. 1913년 주시경에 의해 처음으로 '한글'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당시까지도 한글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서 '언문'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유길준은 '언문'이라는 말 대신 '우리 글자'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는 책의 저술을 모두 마친 후에 친구에게 완성본을 보여주고 받은 비평이 다음과 같다.
"그대가 참으로 고생하기는 했지만, 우리글과 한자를 섞어 쓴 것이 문장가의 궤도를 벗어났으니, 안목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방과 웃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서유견문, 한양출판 발췌
이에 대해 유길준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는 그럴 만한 까닭이 있다. 첫째, 말하고자 하는 뜻을 평이하게 전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으니, 글자를 조금만 아는 자라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내가 책을 읽은 것이 적어서 글 짓는 법이 미숙하기 때문에 기록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우리 나라 칠서언해의 기사법을 대략 본받아서 상세하고도 분명한 기록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서유견문, 한양출판 발췌
「칠서언해」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다음 사전에 의하면 1590년, 그러니까 조선시대 선조 때 세종 때 다 하지 못한 사서삼경을 한글로 번영하여 간행한 유학서이다.
그러면서 이어 적기를 각 나라의 말이 다르기 때문에 글자도 같지 않은 것으로 말이란 사람의 생각이 소리로 나타난 것이요, 글자는 사람의 생각이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라 세종께서 친히 우리나라의 글자를 창조하신 것인데 오히려 우리 글자만을 순수하게 쓰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나는 유길준의 사상과 의식에 눈물이 날 정도로 반하였다. 1960년대에 많은 소설들을 발표한 김승옥을 두고 첫 한글세대 소설가로 칭하고 있으니 우리가 한글로만 된 글을 읽기 시작한 것이 불과 몇 십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
이 책은 유길준이 26세이던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건너갔을 때 기획되었다고 한다. 석 달의 유람이 끝났으나 유길준은 일본에 그대로 남아 일본의 개화된 문물에 대한 공부를 하다가 1882년 6월에 발생한 임오군란으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 해 12월에 귀국했다. 유길준은 개화파로서 민영익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군란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개화 정책을 지지하고 있던 민씨척족정권의 부패와 국고 낭비 등에 대한 불만이 군병들 사이에서 쌓이고 있던 중에 마침 발생한 군료 사건이었기는 하나 대원군의 재집권과 청나라의 종주권이 강화되는 결과로 번졌다. 또한 같은 개화파였던 김옥균과 민영익이 서로 다른 길을 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옥균은 일본과 손을 잡고 서둘러 개화하고자 하는 급진 개화파(개화당)로, 민영익은 청과 손을 잡고 천천히 개화하고자 하는 온건 개화파로 갈리게 된다.
임오군란 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설치되면서 귀국한 유길준은 그곳에서 신문을 간행하는 일을 하다가 민영익이 보빙사절단을 꾸려 미국으로 답사 갈 때 수행원 자격으로 따라가게 된다. 미국의 발전한 모습에 매료된 유길준은 보빙사 일행과 떨어져 더 남아서 유학하기로 한다. 물론 민영익의 후원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채 1년이 되지 않아 갑신정변이 일어나 귀국 명령을 받았다. 갑신정변은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가 청나라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불만을 품어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동시에 이루고자 일으킨 과격한 무장 정변으로서 3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가 일본의 손을 잡았다고 한 근거는 갑신정변을 꾀하는 과정에서 일본 병력의 지원과 자금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며, 온건 개화파가 청과 손을 잡았다고 한 것은 민영익이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이고, 민 씨 수구파는 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신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한편 유길준은 귀국 길에 1년간 유럽을 탐방하고 마지막으로 일본에 들러 망명 중인 김옥균과 만난 일이 있었다. 그로 인해 귀국 후 갑신정변 연루 혐의를 받고 연금 및 유폐된다. 7년간의 유폐 기간 중 유길준은 「서유견문」 집필을 시작하여 1889년에 완성한다.
유길준은 청나라가 독립 외교에 대한 간섭이 지나치다고 정부에 건의하였고, 서양에서 한국의 전기 가설권을 매수하려고 하자 이의 부당성을 주장한 일로 유폐 생활에서 풀려 나고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 다시 복귀하여 내무대신으로으로까지 승진한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에 친일 내각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급진 개화파였던 서재필이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 후 '독립신문'을 간행하고자 했을 때 유길준은 우리 신문의 필요성을 느끼고 국고를 보조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지면서 유길준 역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아관파천은 1896년 민 씨 수구파가 고종의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사건을 말한다. 고종이 아관에 머무른 1년 동안 친일 정권을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유길준은 순종으로부터 사면받아 11년간의 일본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고 흥사단을 설립하였다. 1913년에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과는 다르다고 한다. 유길준이 설립한 흥사단은 국민 개혁을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으로서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과 그 결은 같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유길준의 흥사단에는 일진회가 동참하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보면 유길준은 친일파처럼 보이기도 하다. 1909년 일진회에서 한일합방을 주장했을 때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1910년 한일합방이 된 후 일제가 병합에 협조한 한국인 78명에게 작위를 주었는데 유길준에게도 남작이 내려졌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반환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나는 끝내 알지 못했다. 유길준은 1914년 일제 치하에서 숨을 거두고, 그 후로도 유길준의 일가친척은 친일 행적을 많이도 남겼다. 이에 후세에서는 그를 민족 개혁과 친일적 문명화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책의 가치가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 책을 읽은 소감은 마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과 같았기 때문에 또 그러한 이유로 유길준과 그의 일가의 행적이 원망스럽다. 이 책에는 유길준의 유토피아가 유감없이 드러난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의 조선 시대 모습과 서양의 모습을 비교·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 몇 가지만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 1889년 당시 서양에서는 서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우리나라는 개국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889년이 서기에 의한 연도이고 조선 개국 연호로는 498년이다.
- 당시 우리나라는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1월은 31일, 2월은 28일, 3월은 31일 등 해서 총 365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 당시 우리나라는 하루를 24시간으로 나누지 않았다. "서양의 한 시간이 우리나라의 반 시간이다."라고 적고 있다.
- 한글로 표기하는 외래어는 비교적 원 발음에 가깝다. 예를 들어, England는 잉글랜드로, Austria는 오스트리아로 표기할 수 있는데 중국과 일본식 한자에 의하면 각각 영길리와 오지리가 된다.
- 1889년 당시에는 '억'이라는 숫자 단위가 없었던 것 같다. "억이라고 하는 것은 만 만(萬萬)을 가리킨다."라고 적고 있다.
여기까지가 유길준의 서유견문에 대한 개요이다. 유길준의 일대기와 더불어 책의 집필 배경을 따라가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던 한국의 근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당시 인물들의 모습을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 보면 흑백 사진으로나마 볼 수 있어서 생동감이 느껴졌다. 아직 「서유견문」의 본문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본문에서도 여기저기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으므로 다른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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