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앤, 너는 다이애나
초등학교 시절, 일본 애니메이션 빨강머리 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앤이 한국의 옛날 어른 말투로 조잘대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앤을 보며 나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의 가정 환경이 불우하다고 여겼던 나는 나를 앤 이라 생각했고, 엄마, 아빠와 함께 2층짜리 단독주택에 살고 있던 피부가 하얗던 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여러 면에서 딱 다이애나라고 생각했다. 정작 내 친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어른이 되어 가지게 된 DVD
어느 날 회사에서 문득 빨강머리 앤에 대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을 위로해주었던 빨강머리 앤이 갑자기 보고 싶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어릴 적 보았던 그 영상을 DVD로 구매할 수 있었다. 그 DVD를 소장한 것으로 나는 키덜트가 된 것 같았다. 어른이 되어 빨강머리 앤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사람을 세 번 만났다. 고등학교 친구 하나도 알고 보니 앤의 팬이었고, 거래처 남자 과장님도 빨강머리 앤을 지금까지도 좋아한다고 했고, 둘째 아이 조리원 동기도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여 최근에 뮤지컬을 보고 왔다고 했다. 뮤지컬 관람 후기를 쓰고 받은 스티커, 수첩 등등 몇 개를 뉴질랜드에 있는 나에게 보내 주겠다고 호의를 베풀 정도로 빨강머리 앤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연대감은 끈끈하다고 믿는다.
딸 아이와 공유된 빨강머리 앤
뉴질랜드에서 학교에 다니게 된 딸아이의 Esol 선생님의 이름이 앤 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딸아이에게 처음 빨강머리 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몇 가지 에피소드를 말해주었을 뿐인데 그게 재밌었는지 틈만 나면 또 해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다 문득 내가 DVD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둘째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이면 딸아이와 함께 빨강머리 앤을 보았다. 딸과 나의 관심사를 공유한 것은 예상치 못하게도 딸에게 친구 같은 엄마가 되어 줘야겠다는 목표를 빠르게 이루게 해 주었다. 딸아이는 학교에 가서 앤 선생님에게 'E'가 붙은 앤 인지, 없는 앤 인지 물어봤다고 했다. 바이올린을 배우러 간 음악 학교에서도 앤 이라는 선생님 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선생님 이름을 듣자마자 큰 아이는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그렇게 딸아이와 나는 앤으로 공감대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영어 오디오북으로 만나는 Anne of Green Gables
사연은 잘 모르지만 저작권법에 의한 것인지 어느 날 유튜브에서 빨강머리 앤의 영어 원서 전문을 낭독한 오디오 북을 발견했다. Karen Savage라는 자원봉사자에 의해 녹음 되었는데 영어 발음도 좋고, 목소리 연기도 좋아서 영어 공부 차원에서 지금도 무한 반복 청취 중이다. 오디오북과 함께 공부하기 위해 원서도 운 좋게 뉴질랜드 달러로 1달러 (한국 돈 800원)에 구했다. 영어 원서를 읽고, 들으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 이제는 내가 양육자 입장이 되었기 때문인지 이번에는 앤 보다는 마릴라 아줌마와 매튜 아저씨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마릴라 아줌마의 양육관에 대한 고민 (1), 매튜 아저씨와의 양육권에 대한 조율 (2), 깊어지는 사랑 (3), 훌쩍 커버린 아이를 바라볼 때 교차하는 만감 (4), 독립을 앞둔 아이 그리고 홀로 남겨질 것에 대한 미리 쓸쓸함 (5). 이제 나도 4단계까지는 왔고, 5단계만 남겨 두고 있는 것 같아 나 역시 벌써 쓸쓸하다.
이러다 빨강머리 앤 전문가 되겠다.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Anne With an E」도 영어 공부 차원에서 보았다. 하지만 두 번째 에피소드부터는 원작에 충실한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 첫 번째 에피소드만 백 번을 보았다. 그러고보니 일본 애니메이션 50부작은 지극히 원작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Audiobooks'라는 애플리케이션에서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Anne의 후속작 중 하나인 Anne of Avonlea를 들을 수 있다. 매튜의 죽음으로 퀸즈 대학의 진학을 포기하고 에이번리에서 마릴라와 함께 머물기로 결정하자 길버트가 에이번리 학교의 교사직을 앤에게 양보하고 화이트 샌즈의 교사로 가게 되는 것으로 Anne of Green Gables가 마무리되고 Anne of Avonlea에서는 앤과 길버트, 그리고 또 다른 친구들이 교사가 되어 나누는 이야기, 마릴라의 친척 쌍둥이들을 맡아 기르게 되는 이야기, 또 다시 다른 길로 구부러지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Anne의 전 생애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다. Anne이 진짜 살아 있었던 역사 속의 인물 같다.
최근에는 국문 번역에 관심이 생겨서 번역을 공부한다 생각하고 국문본과 원서를 비교하며 읽고 있다. e-book으로 사면 요즘 199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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