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 그러니까 2020년,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한 케이블 채널에서 파괴된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어두운 장면에 등장한 톰보이 같았던 등장인물에 넋을 잃고 말았다. 그 주인공은 고양이와의 유전자 조합으로 고양이 습성을 가진 초능력 인간 '맥스'를 연기하고 있던 제시카 알바였다. 어찌나 통통 튀고 매력적이던지 언제 방영되는지 몰라 시간이 허락하는 한 그 채널을 끼고 살았다.
약 2~3년간을 다크엔젤 맥스의 세계에 빠져 지내다가 어느덧 사회인이 되었다. 짬짬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제시카 알바의 파파라치 사진들이 올라오는 게시판을 발견하였다. 그제야 제시카 알바가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게시판에 올라오는 사진들 속 제시카 알바의 패션 스타일에 눈길이 갔다. 그때부터 제시카 알바는 나의 스타일러였다. 일명 믹스 앤 매치의 강자였다. 그렇게 줄곧 8년간 파파라치 컷들을 보며 마음에 꼭 드는 착장이 있으면 저장해두었다가 오늘은 뭐 입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저장된 사진들을 살펴보곤 했다. 다크 엔젤의 남 주인공이었던 마이클 웨덜리와 연애 중이라는 것과, 곧 헤어지고 영화 제작자인 캐시 워렌과 결혼하였다는 것, 딸 아너를 출산하였다는 것과 몇 년 후 둘째 딸 헤이븐을 출산하였다는 것까지도 그 파파라치 컷들을 통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런 것도 스토킹일까?
헐리웃 스타이지만 가정을 일궈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이 광팬으로서 기분이 좋았고, 어느새 제시카 알바는 나의 롤 모델이 되어 있었다. 그 사이 나도 결혼을 했고,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으면서 비로소 친환경 제품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조금이라도 친환경적인 육아용품을 찾다가 제시카 알바가 친환경 기저귀를 만드는 회사 'The Honest'를 설립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저귀 외에도 다른 육아 관련 제품을 직접 만들어 미국 전역에 배달하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몇 달 후 디 어니스트는 쿠팡과 제휴를 맺어 한국에서도 제시카 알바의 기저귀를 구매할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디자인이 독보적이고 바스락 거리는 느낌이 친환경적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만 같았던 그 기저귀를 했다.
그리고 내가 회사를 그만둘 무렵, 그녀는 책을 출간했다. 건강하고 안전하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제품을 찾다가 찾지 못해서 본인이 직접 회사를 만들어버렸던 그 이야기가 담긴 일종의 잡지와 같은 책이었다. 건강과 환경을 고려하는 생각이 담긴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을 파파라치 컷이 아닌 책으로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또 뉴질랜드로 오기 전 영어 공부를 하면서 유튜브에 제시카 알바의 인터뷰 영상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그녀의 모습과 생각을 동영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인터뷰 영상들은 영어 공부하는 데 흥미를 돋워 주었을 뿐 아니라 내 삶에 동기를 부여해주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는 인터뷰 장면이 있다. 아역 배우로서 오디션 장에 들어가는 것이 겁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오디션에서 한 번의 합격을 위해 천 번을 거절당했다 ("There's a thousands 'No's for one 'Yes'.")고 대답했다. 후에 다른 인터뷰에서 수 천 번씩 거절당한 경험은 기업을 설립하는 데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원천이 되었다고 했다. 수 백 페이지의 회사 설립 제안서를 직접 만들어 관련 전문가들을 찾아다녔지만 계속 거절당했다고 한다. 크리스토퍼 개비건과 브라이언 리를 만나 공동 창업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이 대목에서 나는 겸손해졌으며 동시 용감해졌다.
오늘 그런 그녀의 회사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되어 공모가 기준으로 기업 가치가 15억 4000만달러(약 1조 7000억 원)였던 것이 장 마감 시 공모가에 비해 약 44% 올라 시가총액 26억8,000만달러(약 3조 원)를 기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간 20년간의 덕질이 생각나서 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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